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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1. 2023

[4-5] 평양성 전투, 세번의 패배

수필 임진왜란

한양을 함락시킨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1592년 7월 9일(음 6월 1일)에 개성까지 점령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성도 버리고 의주로 피란했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중국 땅이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평앙전투는 세 차례 이루어졌다. 제1차 평양성 전투는 평양성을 빼앗긴 전투이고 제2차 평양성 전투와 제3차 평양성 전투는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전투였다. 그것을 간략허개 살펴본다.     


선조는 평양부에서 의주목으로 몽진했다. 평양은 자원한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하였다. 도원수 김명원 대신 좌의정 윤두수가 지휘했다. 그러나 그 역시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지 못하는 실책을 범했다.


7월 20일 (음력 6월 12일) 광해군은 평양부 전역의 남자들을 동원했다. 그리고 ‘자신은 똑같이 행동하겠다.’라고 백성들에게 선전했다. 평양성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올라갔다.


제1차 평양성 전투는 1592년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가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향해 조총으로 사격하며 시작된 전투이다. 


조선군도 이에 맞섰다, 그러나 훈련이 부족한 조선군에게는 비효율적인 전투였다. 그래도 윤두수와 이원익, 김침 등은 당황하지 않고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것도 잠간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그곳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 보고를 들은 윤두수는 허숙과 김억추를 시켜 대동강을 지키게 했다.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에 윤두수는 고언백에게 400명의 병정을 주며 부벽루 밑 능라도의 적을 기습 공격을 하게 했다. 그 작전도 패배하였고, 대동강의 수심이 얕은 것을 일본군에게 알게 하였다. 윤두수와 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평양의 방비 수준을 몰라서 대기하던 일본군이 평양성이 비었음을 알고 무혈입성하였다. 평양부는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했다. 

평양 주민들 앞에서 ‘함께 한다.’고 장담했던 광해군은 안주목으로 후퇴했다.     


제2차 평양성 전투는 조선의 김명원 군대와 명의 지원군 조승훈의 군대가 연합하여 벌인 전투로 정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함께 입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이 황해도 공략을 위해 성을 빠져나갔다. 그것을 조선의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갔다.’라고 보고했다.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조명 연합군 지휘부는 ‘일본군 측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잘못 판단하고는 평양성 탈환의 기회로 여겼다. 나쁜 정보는 나쁜 결과를 낳게 한다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또 판단의 오류가 방생했다.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다. 이때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이 조총을 사격하며 공격했다. 명의 선봉장 사유, 부장 천총, 장국충 등이 전사했다. 


부상을 입은 조승훈은 패잔병만 이끌고 요동으로 돌아갔다.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는 패배로 끝났다. 그날이 8월 24일(음 7월 18일)이다, 


황원의 잘못된 보고는 또 심각한 파장을 불러왔다.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군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헛소문이 나돌게 되었고 그것이 명나라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조선 조정은 사신을 파견해 이를 해명해야 했다.     

제3차 평양성는 1592년 9월 6일(음 8월 1일), 조선군 단독으로 나선 전투인데 같은 장소에서 세 번이나 패배한 부끄러운 전투이다. 


조선군은 총 병력 2만을 편성하여,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이렇게 계획했지만 그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려면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렀을 때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그때 일본군은 퇴각한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그것은 유인 작전이었다.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했따. 


조선군은 둘로 갈라졌다. 지휘체계가 마비되었다. 훈련이 안 된 병사들은 뿔불이 흩어졌다. 이일 군과 이원익 군이 퇴각하는 와중에 김응서 군영은 단독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많은 전사자를 냈다.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평양은 한반도에서 아주 중요한 도시다. 반드시 회복해야 할 땅이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이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독재 치하에 놔둘 수는 없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게 우리가 힘을 모아 이루어야 할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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