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충청도 금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이다.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곳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암진,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함으로 진로가 막혀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을 탈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여러 차례 공격했다.
제일 먼저 공격에 나선 사람은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이다. 그는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7,000 의병을 이끌고 금산을 향해 북상했다. 의병 숫자를 6,000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당시 일본군은 이치에서 권율을 상대하고 있었는 데, ‘고경명 의병이 몰려온다.’라는 소식을 듣고 금산성으로 철수했다.
전투는 8월 15일(음력 7월 9일)에 시작되었다. 고경명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합류하여 공격했다. 왜군은 조총으로 대항했고, 고경명 의병은 성 주위에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와 30명의 특공조를 편성하여 벌인 공방전이었다.
날이 저물어 첫날의 치열한 전투가 끝났다. 그런데 곽영이 ‘철수하자.’라고 한다.
곽영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1576년(선조 9) 전라도우수사, 1578년 경상도병마절도사, 1591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1592년 7월 13일, 용인 전투에 참전했다. 전라감사 이광, 전라도 관찰사 권율,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등과 함께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참전했다.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라.’ 하는 권율의 충고를 무시하고 나가 일본군 5명을 사살했다.
14일 아침, 밥을 먹으려 할 때 일본군의 기습 공격이 있었다. 곽영을 비롯한 조선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공격한 일본군 1,600명에게 8만 대군이 참패했다.
이랬던 그가 금산 전투에서 또 꽁무니를 뺀다. 그러나 ‘끝까지 싸우자.’ 하는 고경명의 주장에 따라 다음 날도 공방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대장이 전의를 상실하면 그 전투는 하나 마나다. 따라서 곽영의 관군을 떼냈어야 옳았다. 고경명의 실수는 전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왜군은 상대적으로 허술한 곽영의 진영을 집중 공격했다. 그러자 관군이 무너지고 이어서 의병도 무너졌다. 유팽로와 안영 등이 총탄에 맞았고, 고경명도 전사하고 그이 둘째 아들 고인후도 전사했다. 이들의 머리가 일본군의 창끝에 걸렸다.
전투가 종결되고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아버지와 동생의 머리 없는 시신을 수습했다. 스스로 복수장군이라 칭하며 눈물로 아버지와 동생의 장례를 치렀다. 이게 금산 제1 전투이다.
의병장 고경명의 전사 후에도 금산을 탈환하려는 관군과 의병이 있었다. 그때는 왜군이 선수를 쳤다. 북진하려던 보성과 남평의 군대를 선제공격하여 남평 현감 한순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금산 제2 전투에 나선 사람은 청주성을 탈환했던 의병장 조헌이다. 그는 1,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을 향해 나아갔다.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군사만 축낼 것’이라 하며 거절했다. 행주산성의 명장 권율은 ‘금산은 중요한 위치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홍의 장군 곽재우도 ‘금산 외에도 중요한 요지가 많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청주성 탈환 전투에 참여했던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조헌에게 사람을 보내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윤국형이 이끄는 관군은 아예 방해까지 했다. 이 전투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로 인해서 의병은 700명으로 줄었다. 이쯤 되면 고집을 피울 일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청주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영규 대사가 승병 600명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다.
전투는 9월 23일(음 8월 18일)에 벌어졌다. 왜장은 조헌의 군사가 소수이며 후속 부대도 없다는 약점을 간파하고 퇴로를 끊었다. 그리고 금산성 밖 평야 지대에서 포위를 시도했다. 그런데 조헌 의병에게 화살이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육박전을 벌여야 할 상황이다. ‘피신하라.’ 참모가 간언했으나 조헌은 거절했다. 직접 북을 치며 독전하다가 전사했다. 아들 조극관도 죽고, 700 의병도 죽었다. 영규 대사와 600 승군도 전사했다. 금산에는 조헌과 의병의 헌신을 기리는 ‘칠백의총’이 있다.
금산 전투 이후 전라방어사 곽영은 어찌 되었을까? 그는 단 한 번도 용감하게 싸우지 못한 졸장(拙將)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이랬던 그가 1595년 우변포장(右邊捕將)·행호군(行護軍)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9년 왕비가 수안(遂安)에 머물 때 호위대장으로서 공을 세워 잘 길든 숙마(熟馬) 1필을 하사 받았다.
이런 내용의 글을 쓰려고 하니 서글퍼진다.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처럼 나라를 위해 순절하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곽영처럼 졸장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목숨을 부지하라고 말해야 할까?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더 소중할까? 의병장 고경명 부자(父子)의 숭고한 죽음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듯하여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