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10부
정인홍 선생은 어린 시절, 산사에서 글을 읽었다. 도 감사 양희가 자주 찾는 산사이다. 그렇다면 상당히 유명한 사찰일 것이다. 이렇게 예상하며 해인사로 올라갔다.
거기에 삼층 석탑이 있다. 구광루 앞 널찍한 마당에 석등과 나란히 서 있다.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으로 해인사 창건 당시 세워진 탑’이라 소개한다. 그렇지만 문화재란 말도 없고, 탑 옆에는 선생의 시 ‘頌松(송송)’의 글감이 되는 소나무도 없다.
돌아오는 길에 청량사로 향했다.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 ‘청량사’와 같은 이름이다. 혹시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이 청량사까지의 거리를 3km라고 안내한다. 기념관 바로 옆에 있다는 말과 다르다.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운전하는 아내가 불평이다. 그래도 한참 만에 ‘천불산 청량사’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입구 한쪽의 안내판에서 ‘청량사는 해인사에 속한 암자’라고 소개한다. 문화재도 함께 소개한다. 보물 제253호로 9세기 끝 무렵의 작품인 석등, 보물 제265호로 9세기 초부터 절을 지켜온 부처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68호로 신라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지닌 삼층석탑 등 셋이다.
탑이 있다니 반갑다. 그것을 보려고 바삐 올라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웅전 앞마당에 석등이나 석탑은 없다. 석조여래좌상은 굳게 닫힌 대웅전 안에 있을 것이다. 안내판에서 소개한 문화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키 작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에 동그란 모양의 맷돌을 깔아 만든 스님들의 ‘묵상길’이 있고, 그 주변에 소나무가 두 그루 있다. 450여 년 전 선생의 시 ‘송송’의 글제라 하기에는 턱없이 어리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안내판의 석등과 삼층 석탑의 그림을 다시 보았다. 해인사에서 보았던 그것들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내 실력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
‘천불산 청량사’는 일반 사찰일 뿐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아니었다. 선생의 사당 청량사는 ‘정인홍 기념관’ 바로 옆에 있었던 작은 집이었다. 그것을 나중에 알았다.
운전하는 아내의 수고가 있었지만, 정인홍 선생의 흔적 찾기는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고속도로 주변의 경치가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정인홍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도 함께 지나간다.
어린 시절 선생은 비범하고 영특했다. 스승 조식으로부터 칼을 하사받을 만큼 선망의 대상이었다. 관리가 된 선생은 법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사헌부 장령으로 최적의 인물이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임무에 충실한 덕분에 선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영남지역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의병도대장이었다.
이랬던 선생이 전쟁 이후에는 탄핵을 일삼았다. 남인 류성룡을 영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서인 정철을 향하여 ‘죽여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선생의 과격한 탄핵은 또 다른 탄핵을 불러왔다. 먼저 동인이 서인을 탄핵하고 나중에 서인이 동인을 탄압했다. 그런가 하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서 서로 탄핵하고, 북인은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어서 탄핵했다. 이런 비극의 역사가 선조 대는 물론 광해군 대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백성들에게는 편한 날이 없었다.
현재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많다. 그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7천 의병을 모집한 호남의 대표 의병장 고경명은 향년 60세로 금산 전투에서 목이 잘린 채 순국했고, 진주대첩의 맹장(猛將) 김시민은 향년 39세로 적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으며, 의병장으로 정인홍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김면은 향년 53세로 전투를 준비하던 중 병사했다. 그런가 하면 명량해전의 영웅 이순신은 향년 54세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쟁이 끝난 후로 무려 25년을 더 살았다. 그러다가 인조반정에 성공한 자들에 의하여 참수형을 당했다. 참수형(斬首刑)이란 목을 베는 형벌로 ‘정승을 지낸 자는 참수형을 가하지 않는다.’ ‘80세 이상의 고령인 자나 10세 이하의 어린 자에게는 참수형을 가하지 않는다.’ 이런 관례가 있었으나, 정승을 지낸 바 있고, 당시 88세의 고령이었던 정인홍에게 그 관례는 적용되지 않았다. 정인홍에게 전쟁 이후 25년은 축복된 삶이 아니라 저주의 삶이었다.
오늘날에도 탄핵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 탄핵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사화가 네 번이나 일어났었다. 그것을 조선 시대 4대 사화라고 한다.
첫째는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의 원인이며, 사림파가 숙청된 사건이다. 둘째는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이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폐비 윤씨 사건에 가담한 신하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다. 셋째는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가 숙청당한 사건이다. 넷째는 명종 1년(1545)에 일어난 을사사화이다. 왕실의 외척인 소윤과 대윤의 권력 다툼 중에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신은 젊었을 때부터 변방에서 일했으며,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도 전심전력으로 섬겨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신에게 죽을죄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어느 신하의 유언이다. 정인홍 선생의 흔적을 찾으려다 탄핵과 사화로 얼룩진 피의 역사만 확인했다. 그것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