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10부
합천군을 향해 출발했다. 7월의 땡볕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지만, 파란 하늘, 뭉게뭉게 피어오른 하얀 구름, 살랑살랑 부는 바람, 여행하기에 참 좋은 날이다.
오늘 여행의 목적은 정인홍 선생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이다. 정인홍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그의 유적지를 찾을 수 없다. ‘그가 출생한 지역에는 뭔가 있겠지.’ 하는 기대를 안고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으로 간다.
북광주 나들목으로 진입한 자동차가 고속도로 위를 경쾌하게 달린다. 담양, 순창, 남원을 지나고 상동 터널도 통과했다. 지리산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는 거창, 함안을 지나 해인사 나들목을 통해 나왔다. 거기가 바로 합천군 가야면이다. ‘가야면’의 ‘가야’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었던 부족국가로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 고령 지역의 대가야, 성주 지역의 성산가야, 함안 지역의 아라가야, 진주 지역의 고령가야, 고성 지역의 소가야 등 6가야를 말한다.
가야면 행정복지센터 담장 밖으로 ‘푸른 숲 맑은 물 아름다운 합천 팔경’이란 제목의 안내판이 보인다. 제1경은 가야산이고 제2경은 해인사이다. 그런데 내가 찾아가는 정인홍 선생의 유적지는 없다. 면사무소 민원실로 들어갔다.
“정인홍 선생님의 유적지를 답사하러 왔습니다.”
도움을 청했더니, 여자 직원이 건물 밖으로 나와서 친절하게 안내한다. 정인홍 선생의 유적지는 도로 왼편에 있는 ‘정인홍 기념관’이었다. 출입문 바로 오른쪽, 담벼락에 문패가 붙어있었으나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 건너편에 <정인홍 선생과 부음정> 이런 제목의 안내판이 있다. 아, 오자가 눈에 띈다. 선생의 출생연도가 1535년이 아닌 1536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음력 날짜로는 ‘1535년’인데,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1536년’이 되기도 한다.
왼쪽, 아담한 크기의 건물 ‘정인홍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頌松(송송)>이란 제목의 시가 반긴다. 선생의 나이 11세 때 지은 시이다. 소년 정인홍은 산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글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를 산사에 와있었던 도 감사 양희가 들었다. 기특하게 여긴 양희는 인홍에게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 탑 옆에 서 있는 왜송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시에 나타난 정인홍의 자아의식은 차원이 다르다. 글감은 소나무인데 그것을 탑과 비교한 것이 놀랍고, 11살의 어린아이가 자신을 경상 감사의 벼슬 높은 어른과 비교하는 경쟁의식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다.
일흔을 훌쩍 넘겼음에도 나는, 11살 정인홍의 생각을 따르지 못한다. 그 총명함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라는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벽면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선생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거기에는 출생연도가 ‘1535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바깥의 안내판과 일치했으면 좋겠다. 정인홍 선생의 초상화도 있다. 그 오른쪽으로 임진왜란 중에 세운 선생의 전공(戰功)을 소개하고, 부음정과 청량사도 소개한다. 이어서 스승에게서 하사받은 은빛 칼도 전시되어 있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 오른쪽에 비석이 있다. 기단은 거북 모양이고, 용의 모양이 새겨진 직육면체 모양이며, 가운데 비석에는 ‘영의정(領議政) 정래암(鄭來蓭)’이란 제목 아래 작은 글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래암’은 선생의 호이다.
비석 바로 앞쪽에 작은 집이 있다. 담장이 빙 둘러싸고, 철조망으로 된 출입문은 주먹만 한 자물쇠로 잠가놓았다. 안내문도 없고 현판도 보이지 않는다.
비석의 오른쪽, 언덕 아래에 기와지붕의 한옥 두 채가 기역 자 모양으로 놓여 있다. 좁은 데크 계단을 이용해서 마당으로 내려갔다. 좁디좁은 마당의 오른쪽 건물은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길렀다는 ‘부음정’이다. 오른쪽 2칸은 마루, 왼쪽 2칸은 방으로 구성된 조금은 특이한 구조의 집이다. 다른 하나는 살림집인데, 3칸짜리 작은 집이다.
유적지의 답사(踏査)를 마쳤다. 그런데 마음이 쓸쓸해진다. 아니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중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영웅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 의병을 일으켰다. 합천에서 김면과 함께 일으켰다. 청주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고, 6월에는 고령군 무게 전투에서 왜적을 격파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영남 의병장’이란 별호를 얻었다. 더 나아가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했다. 8월에 공격하고 9월에도 공격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10월에는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을 외부에서 공격하여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했다. 그 공로로 11월에 진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지방관들도 정인홍을 ‘영남의병도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정인홍은 그것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정인홍을 불러냈다. 66세인 1602년 1월, 선조는 사헌부 장령으로 부르고, 곧바로 대사헌으로 승진시켰다.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게 했다. 광해군도 정인홍을 불렀다. 76세인 1612년(광해군 4) 우의정으로, 82세인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으로 불러냈다.
그런데 정인홍 사후 400여 년이 지난 오늘, 역사는 영웅을 기억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정인홍 기념관’이 검색되지 않았고, 가야면사무소에 문의했을 때, 남자 직원은 시설물의 이름도 몰랐다. 찾아간 ‘정인홍 기념관’은 도로변에 있었는데 주변 조경은 물론 나무 한 그루 없이 건물 한 채만 달랑 있다. 부음정으로 내려가는 계단 일부가 부서져 있고, 한 뼘도 안 되는 좁은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했으며, 부음정 마루에는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다.
씁쓸한 마음으로 문을 나서는데 소리가 들린다. 정인홍의 목소리다.
‘백 명의 친구보다 한 사람의 적이 더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