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 정인홍에게 미친 탄핵의 폐해

수필 임진왜란 제9부

by 수필가 고병균

임진왜란이 끝났다. 당시 62세였던 정인홍은 고향 합천으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하며 살았다. 이런 그에게 ‘산림 정승’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이러는 중에도 정인홍을 자꾸 불러냈다. 선조가 불러내고, 광해군도 불렀다.

63세인 1599년 12월,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66세인 1602년 1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그해 사헌부 대사헌으로 승진했다. 이때 정인홍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다. 선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일축했다.

“감히 네가 정인홍을 배척하여 모함할 계획이나, 인홍의 사람됨은 금수나 초목도 다 아는 바다.”

정인홍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인홍을 비방한 관리들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잠복해 있을 뿐이다.

그해 4월 말 정인홍은 정경세를 탄핵했다. 정경세는 1563년생으로 정인홍보다 27년 후배이다. 그래도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중앙정치의 거물이다. 이런 그가 모친의 상중 육식을 하였고, 사명을 띠고 관동지방에 가서는 기생을 끼고 놀았다. 이런 비리가 있었음에도 눈치만 볼 뿐 그를 탄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정인홍이 들고 나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헌부의 다른 관원들이 정인홍을 비판했다.

같은 해 7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나중에 지중추 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공조판서 아래 공조참핀 그 아래 공조참의 순이다.

68세인 1604년, 조식의 문집 《남명집》을 발간했는데, 발문 중에 퇴계 이황을 비평한 정인홍의 글을 문제 삼아 성균관 유생들이 규탄했다. 글 쓰는 사람은 이런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70세인 1606년,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했다. 그는 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72세인 1608년, 3월 1일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4월에 세자시강원 보양관이 되었다가 5월 말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세자시강원’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1608년 2월 2일(3월 17일) 조선 제15대 국왕으로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도 정인홍을 불렀다. 정인홍의 문하생 이이첨과 유자신 등이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여러 번 불렀다. 그러나 정인홍은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북의 영수로서 요집조권(遙執朝權)하는 위치에 있었다. ‘요집조권’(遙執朝權)이란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정인홍을 아니꼽게 보는 관리들이 있었을 것이다.

74세인 1610년 9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있었다. ‘문묘’(文廟)는 공자(孔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고, ‘종사’(從祀)는 문묘나 사원에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시는 것으로 배향(配享)과 같은 의미다. 그리고 문묘종사란 종래 모셔 오던 선현들 외에 신주를 추가로 모시자는 것을 결정하는 국가적 절차이다.

정인홍은 상소를 올렸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인 중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는 상소였다. 그 두 분이 ‘조식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황의 제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이들은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捲堂)에 들어갔었고, 성균관의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였다. ‘권당’(捲堂)은 현재의 동맹휴학과 같은 실력행사이고, ‘청금록’은 성균관에 비치된 유생들의 명부(名簿)이다.

87세인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정권을 잡은 서인에 의해 정인홍은 체포되었다. 죄목은 다섯 가지다. 첫째, 사림 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품관(品官)이었다. 둘째,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무단의 위세를 부렸다. 셋째, 괴기한 학문을 퍼뜨렸다. 넷째,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 다섯째, 폐비를 반대한 동료요 후배인 정온(鄭蘊), 이대기(李大期)를 구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죄목은 없다.

4월 3일 정인홍은 참수형에 처해졌다. ‘정승을 지낸 인물과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참수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전례도 무시했다. 정인홍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 나이 열다섯부터 스승 남명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워 군신부자(君臣父子)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아! 슬프다. 구원(丘園)에 물러나 있은 지 지금 20여 년! 어지러운 세상일을 듣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90세의 모진 목숨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마침내 폐모(廢母)의 죄명을 얻으니, 이제 한 번 죽음에 돌아봐 서운한 것은 없으나. 장차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선조 임금)을 뵙겠는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정인홍의 문도들은 비분강개(悲憤慷慨)했다.’ ‘벼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합천 고을에서는 벼슬하는 사람이 끊어졌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성경 말씀이 생각난다.

소말리아 해적을 퇴치한 ‘아덴만 여명 작전’의 영웅 청해부대는 굶주린 소말리아 백성들에게 쌀을 보급해주며 사랑을 베풀었다. 이후 소말리아 해적은 한국 국적의 배는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보호해준다.

정인홍의 탄핵에 ‘군신부자(君臣父子)의 대의’라고 하며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주장했다. 그렇지만 거기에 사랑은 없었다. 그 결과 정인홍의 탄핵은 다른 탄핵을 불러왔다. 그 탄핵은 악순환의 소용돌이가 되어 돌아왔다. 다른 사람 아닌 본인에게로 돌아왔다. 88세(만 나이로는 87세)의 늙은 나이에 참수형이라는 비운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의 영웅 정인홍은 역사에서 잊힌, 비운의 영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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