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영남 의병도대장, 정인홍

수필. 임진왜란 제9부

by 수필가 고병균

자신에게 엄격했던 정인홍은 다른 관료에게도 엄격함을 강요했다. 그것 때문에 정인홍을 미워하는 관료가 하나둘 나타났다. 그러던 중 정여립 옥사 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인홍은 관직에서 물러나 합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56세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가 위해 정인홍도 나섰다. 어떤 활약을 펼쳤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식 밑에서 동문수학(同門受學·同門修學)한 곽재우와 정인홍은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가 의령에서 일으키고 정인홍은 합천에서 김면과 함께 일으켰다. 정인홍은 앞장서지 않고 자신보다 5년 연하인 1541년생 김면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김면과 정인홍이 인솔한 의병은 강했다. 그해 5월 성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다. 이 공로로 정인홍은 ‘영남의병장’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6월에는 고령군 무계 전투에서 매복 공격으로 왜적을 격파하고, 8월과 9월에는 성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10월에는 적에게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

그해 11월, 지방관들은 정인홍을 영남 의병도대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정인홍에 관한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경상도 의병장 중에서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고 칭송한다.

“정인홍은 자신의 전공(戰功)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보고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것 때문에 조정에서 알고 있는 그의 공로는 남보다 못하지만, 실상은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


57세인 1593년, 성주를 수복한 정인홍은 국가재건계획이 담긴 「사의장봉사」라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영남 의병도대장도 사직하고 의병장으로만 활동했다. 그는 명성을 얻었고,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했다.

그해 9월에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의 청으로 영남의병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고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어야 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전쟁을 극복하고 국가 재건의 방법을 건의한 내용이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런 말이 있다. 그런데 조선의 왕이나 대신 중 그 누구도 영남 의병도대장 정인홍의 상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지 않았고, 국가 재건의 방법을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상대방을 탄핵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안타깝게도 그것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58세인 1594년, 상주 목사 영해 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형조 참의,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그것도 모두 사양했다.

59세인 1595년, 고령 성산 무계지역을 지나가던 중 ‘일본 측과 화의(和議)하자.’는 주장을 들었다. 정인홍은 ‘과무계(過茂溪)’라는 시를 지었다. 주화론자를 질타한 시다.


匹馬經過舊戰場(필마경과구전장) 필마로 옛 싸움터를 지나노라니

江流遺恨與俱長(강류유한여구장)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於今誰唱和戎說(어금수창화융설)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將士當年枉死亡(장사당연왕사망)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61세인 1597년 7월, 일본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 정유재란이다. 의병에 참전한 정인홍의 아들 정연(鄭沇)을 잃었다. 정인홍은 이에 개의치 않고 또 창의했다. 투철한 국가관을 보여준 정인홍은 전쟁이 종결된 1598년 합천으로 돌아왔다.

62세인 1598년,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명나라 경략 정응태(丁應泰)가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보고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변무사(辨誣使)를 파견하려 했다. 그러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남인의 영수 류성룡은 개인적인 사정을 들어 피하였고, 다른 신하들도 나아가기를 주저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정인홍은 명나라 인사에게 편지를 보내 선조를 옹호했다. 이 일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정인홍은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정인홍은 의병장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충성했었고, 사헌부 장령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마음으로 탄핵을 일삼았다.

불행하게도 그를 미워하는 자가 하나둘 나타났다. 그는 사헌부 장령 정인홍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자들이다. 저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정인홍을 무차별 공격했다. 그 결과 정인홍은 역사의 적이 되고 말았다.


역사가 겸 작가였던 이병주(李炳注)는 ‘정인홍을 역적’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무덤을 찾아가 그의 죄를 논하기도 했던 그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중학교 다닐 때, 멋모르고 내암의 무덤 위에 올라가 내암의 죄업을 매도했었는데, 김충렬(金忠烈) 교수의 글을 보고는 ‘어이쿠, 그게 아니었구나!’ 하며 크게 후회했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당시 영남 의병도대장으로 뛰어난 공적을 남겼다. 사헌부 장령으로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100명의 친구보다 1명의 적이 더 무섭다.’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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