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영남 의병도대장, 정인홍

수필. 임진왜란 제9부

by 수필가 고병균

자신에게 엄격했던 정인홍은 다른 관료에게도 엄격함을 강요했다. 이러면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난다. 정인홍을 미워하는 관료가 하나둘 나타난 것이다.

1589년, 정여립 옥사 사건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53세 정인홍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고향 합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겉은 부드럽고 순한 듯하나 속은 꿋꿋하고 곧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품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스승 조식 말고 그것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다. 56세 정인홍과 51세 김면이 그 뒤를 이었다. 둘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정인홍은 나서지 않고, 김면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김면과 정인홍이 인솔한 의병은 강했다. 그해 5월 성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다. 이 공로로 정인홍은 ‘영남의병장’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6월에는 고령군 무계 전투에서 매복 공격으로 왜적을 격파하고, 8월과 9월에는 성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10월에는 적에게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

그해 11월, 지방관들은 정인홍을 영남 의병도대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정인홍에 관한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경상도 의병장 중에서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고 칭송한다.

「정인홍은 자신의 전공(戰功)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보고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것 때문에 조정에서 알고 있는 그의 공로는 남보다 못하지만, 실상은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


57세인 1593년, 성주를 수복한 정인홍은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도 구축했다. 그러나 영남 의병도대장을 사직하고 의병장으로만 활동했다.

그해 9월에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의 청으로 영남의병대장에 임명되었다. 정인홍은 나아가지 않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사의장봉사>라는 장문의 상소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다. 나라가 전쟁에 휘말린 원인을 분석하는 내용이 그 하나요, 전쟁을 극복하자는 내용이 그 둘이며, 장차 국가재건계획을 담은 내용이 그 셋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정인홍의 상소에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원인을 분석하려 하지 않았고, 전쟁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으며, 국가 재건의 방법을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상대방을 탄핵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58세인 1594년, 상주 목사 영해 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형조참의,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그것도 모두 사양했다.

59세인 1595년, 고령 성산 무계지역을 지나가던 중 ‘일본 측과 화의(和議)하자.’라는 주장을 들었다. 정인홍은 <과무계(過茂溪)>라는 시를 지었다. 주화론자 곽재우를 질타한 내용의 시다.


匹馬經過舊戰場(필마경과구전장)

필마로 옛 싸움터를 지나노라니

江流遺恨與俱長(강류유한여구장)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於今誰唱和戎說(어금수창화융설)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將士當年枉死亡(장사당연왕사망)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1597년 7월, 일본군이 다시 침략해 왔다. 정인홍은 의병에 가담한 아들 정연(鄭沇)을 잃었다. 61세의 나이에도 개의치 않고 또 창의했다.

1598년 전쟁이 끝났다. 62세 정인홍은 고향 합천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명나라 경략 정응태(丁應泰)가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라고 보고한 것이다. 선조는 명나라에 변무사(辨誣使)를 파견하려 했다. 그러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남인의 영수 류성룡마저 개인적인 사정을 들어 피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정인홍은 명나라 인사에게 편지를 보내 선조를 옹호했다. 이 일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식의 제자 곽재우와 정인홍 둘은 의병장으로 맹활약했다. 곽재우는 소수의 병력으로 기강 전투에서 적을 물리쳤고, 정암진 전투에서는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도 적을 물리쳤다. 한편 정인홍은 김면을 앞세우고 이치 전투에서 우척현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영남의병대장’, ‘의병도대장’ 등의 칭호를 받으며 활약했다. 두 분은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났을 때 둘은 뜻이 엇갈렸다. 곽재우는 ‘일본과 화친하자.’라고 건의했고, 정인홍은 그것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역사가 겸 작가였던 이병주(李炳注)는 ‘정인홍을 역적’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무덤을 찾아가 그의 죄를 논하기도 했던 그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중학교 다닐 때, 멋모르고 래암의 무덤 위에 올라가 래암의 죄업을 매도했었는데, 김충렬(金忠烈) 교수의 글을 보고는 ‘어이쿠, 그게 아니었구나!’ 하며 크게 후회했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지방관들로부터 ‘영남의병도대장’이란 칭호를 받을 만큼 큰 공을 세운 영웅이었고, 전쟁 이후에는 임진왜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국가 재건을 고민한 영웅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매거진의 이전글[9-8] 사헌부 장령, 정인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