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사헌부 장령, 정인홍

소설. 임진왜란 제9부

by 수필가 고병균

1572년(선조 5년), 남명 조식은 36세의 제자 정인홍에게 자신의 칼을 물려주었다. 학자로서의 의리와 결단의 징표로 하사한 것이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정인홍은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학행으로 이름을 날린 그를 세상이 그냥 놔둘 리 없다.

37세인 1573년(선조 6), 조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김우옹의 천거로 6품직 벼슬에 올랐고, 39세인 1575년, 황간 현감에 나가 지방관리로 선정을 베풀었다. 황간현(黃澗縣) 은 영동군 동부 지역의 옛날 행정구역 명칭이다.

44세인 1580년 12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사헌부는 사정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寃抑)을 풀어주며, 남위(濫僞)를 금하는 고등법원과 같은 기관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장령’은 사헌부에 속한 정4품으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인물이 임명되었다.

성품이 올곧은 정인홍은 장령으로서 직무에 충실했다. 법령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이서(吏胥)들의 부정과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했다.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그들에게 탄핵을 가했다. 그의 강직함은 지방까지 소문으로 퍼졌다.

‘정 장령의 얼굴 생김새가 어떠한가. 그 위엄이 멀리 지방에까지 퍼져 병사와 수령 중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참으로 대장부다.’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정신을 차렸으며, 시장의 장사치들도 금하는 물건을 밖에 내놓지 못했다.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마치 세상이 변화되는 듯했다.


45세인 1581년, 또 사헌부 장령이 됐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될 때,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에 가담한 정인홍은, 서인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했다. 그러다가 도리어 자신이 해직당하였다. 아, 정인홍에게 사랑이 부족하다.

정인홍은 탄핵을 멈추지 않았다. 세조부터 명종까지 권력을 장악해 온 훈구파와 척신정치와 그 남은 세력 청산에 소극적인 서인을 여러 차례 탄핵했다. 심지어 자신과 같은 당파인 동인의 지도자 우성전을 탄핵했는데,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백성들이 떠받드는 지도자였다.

이런 그를 사헌부의 다른 관리들이 비판하고, 율곡 이이는 ‘돌격장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정인홍의 올곧은 성품도 과유불급이다.

50세인 1586년, 정인홍은 익산 군수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고 왕에게 상소를 올려 ‘학문에 힘쓸 것’과 ‘정치적 폐단을 혁신할 것’ 등을 주장했다. 그것이 왕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의 처신이 극단으로 치닫는 듯하여 조심스럽다.

53세인 1589년, 정여립 옥사(鄭汝立獄事)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의 난’이라고도 하고 ‘기축옥사’라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정철, 성혼 등 서인이 득세하고, 이발과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등 동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정여립 옥사 사건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의 4대 사화로 희생된 사람이 500명인데, 정여립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이 무려 2천여 명이나 된다. 이발의 80대 노모와 10세 미만의 자녀까지도 죽였다.


여기서 정여립 역모 사건의 수사와 국문을 맡은 위관 정철에 관해 알아본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년) 음력 12월 6일 한성부 종로방 장의동(藏義洞, 現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녕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과 죽산 안씨 사이의 자녀 4남 3녀 중 넷째 아들이다. 그의 맏누이는 인종의 후궁인 귀인(貴人)이었고, 둘째 누이는 왕족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하였고, 명종과는 소꿉친구였다. 조선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10대 연산군 11대 중종 12대 인종 13대 명종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을 지나 14대 선조 15대 광해군까지 이어졌다.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위관으로 선임된 정철은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 등을 제거했다. 제거의 근거는 이들을 왕의 권력을 위협한 권신이라는 것이요, 국정을 망치면서 나라를 어지럽게 할 간신이라고 것이다. 선조가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옥사가 지나치게 확대되자 정철은 이것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조정을 주름잡던 신하들을 모조리 쳐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왕 선조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트집을 잡았고 사소한 것이라도 문제 삼았다. 정여립의 난은 선조가 만들어낸 누명이라 보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동인 출신 이발은 권간의 누명을 쓰고 죽었다. 그 원망은 모조리 서인 정철에게로 향했다. 전라남도 함평의 광산 이씨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외치는 구호가 있다.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이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축옥사 전에 이발은 동인의 강경파로 서인인 심의겸, 박순, 송익필, 이항복 등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까지 추국장에 끌려왔다. 정철은 ‘82세 노모와 10세 이하 자녀는 살려주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탄핵은 조정을 주름잡던 신하, 껄끄러운 자들을 제거하려고 선조가 꾸민 농간이다. ‘정여립의 난’ 이전에는 동인 출신 이발로 하여금 서인을 탄핵하게 하더니, 그 이후에는 서인 출신 정철로 하여금 동인을 탄핵하게 했다. 여기에 더하여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 정인홍을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하여 탄핵을 끊임없이 부추겼다.

그 결과 탄핵은 소용돌이가 되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탄핵의 소용돌이는 미친 듯이 돌아간다. 멈출 줄 모른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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