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사공이 많은 임진강 전투

수필 임진왜란 제2부

by 수필가 고병균

“임진강을 지켜라.”

몽진하던 선조가 내린 다급한 명령이다. 임진강(臨津江)은 서울의 북쪽에 있다. 강원도에서 발원하여 한반도를 가로질러 한강과 합류한다. 어명을 받은 도원수 김명원은 1만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임진강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한편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북쪽으로 진격할 전략을 세웠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서울에 머무르면서 전군을 총지휘한다.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으로 간다.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방면으로 간다.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로 가서 1군을 후원한다.

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는 강원도로 가서 2군을 후원한다.


선발대로 출발한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는, 1592년 5월 10일(6월 19일) 임진강의 남쪽에 도착하여 건너편의 조선군과 대치했다. 강변에는 배가 없다. 조선군이 미리 없애버렸다. 뗏목을 만들기에도 여의치 않다. 그리고 강물이 불어 물살도 급하다. 시간을 끌면서 서로 대기할 수밖에 없다.

조선의 국왕 선조는 임진강 전선의 지휘관들에게 잇달아 어명을 내려보냈다. ‘왜 진격하지 않느냐?’ 하는 책망 조의 어명이다.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숫자가 적으니, 늦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변사의 건의가 올라왔다.

“아니, 김명원 저 사람은 한성을 잃었는데도 왜 공격을 안 하고 가만히 있죠? 장수들도 말을 안 듣네요.”

“한응인에게 독자 지휘권 맡겨서 공격하도록 합시다!”


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종 때 설치되어, 군국(軍國)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이다. 그런데 이런 터무니없는 건의를 한다. 선조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들여 한응인에게 지휘를 맡겼다. 제도체찰사(諸道體察使)라는 직위까지 만들어주면서 그랬다. 그러나 전투의 승패는 왕의 말에 있지 않고 지휘관의 능력에 있다. 그것을 옥포 해전의 영웅 이순신과 정암진 전투의 영웅 곽재우가 증명했다.

그 결과 부대의 지휘권이 둘로 쪼개졌다. 하나는 도원수 김명원이요, 다른 하나는 제도체찰사(諸道體察使) 한응인이다. 김명원은 해유령 전투의 공로자 신각을 죽이게 한 일이 있고, 한강을 지키지 못한 책임도 있다. 그것 때문에 선조 앞에서 말도 못 한다. 그런가 하면 선조의 어명은 한응인에게 하달된다. 김명원은 허수아비 지휘관이 되고 말았다.

한응인은 어떤 인물일까? 북경과 연경을 수차례 다녀온 외교관이다. 전투에서는 문외한이다. 다만 1554년생으로 당시 54세인 김명원보다 15년 정도 젊을 뿐이다. 한응인을 추천한 자는 윤두수였다. 얼굴에 복이 가득하다는 것이 추천 이유였다. 어처구니없다.

어명을 받은 한응인은 강변군에게 돌격 준비를 명했다. 그때 일본군이 진을 철수하고 있다. 김명원이 ‘거짓 후퇴인 것 같으니, 섣불리 갈 일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작전 권한이 없었다. 그리고 어명인지라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때 조방장 유극량 등 강변군 수뇌진에서 ‘일본군의 동태가 수상하니 출전을 연기하자.’라는 건의가 올라왔다. 유능한 지휘관은 반대하는 장수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작전을 의논한다.

그렇지만 방어사 신할 등은 ‘왜군을 무서워한다.’는 이유로 탄핵했다. 한응인은 신할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신중한 자들의 목을 베었다. 유극량의 차례가 되었다. “제가 어찌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단지 나랏일을 그르칠까 두려웠을 따름입니다.” 말하고는 강을 건넜다. 신할은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동생이다. 형을 닮아 용감했으나 성격이 과격했다.

전투에 무식한 한응인은 전문가의 경고를 두 번이나 무시했다. 김명원의 경고를 무시하고, 유극량 등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는 선조의 독촉에 목이 말랐는지 모른다.

결국, 조선군은 임진강을 건넜다. 신할도 건넜고, 한응인도 건넜다. 강변군 13,000명 중 절반이 건넜다. 거기에 소수의 일본군이 있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조선군은 달려들었다. 그때 산속에 숨어 있던 가토의 일본군이 뛰어나왔다. 일본의 매복 작전에 말려든 것이다.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저들의 칼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었다. 큰소리쳤던 신할도 죽었고, 반대했던 유극량도 전사했다. 그 비극의 날이 바로 1592년 5월 18일(6월 27일)이다

강 너머에서 이 광경을 바라본 나머지 조선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하나둘 도주하더니 순식간에 군 전체가 붕괴하고 말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변군이 타고 건넌 배는 모두 일본군의 배가 되었다. 일본군의 작전을 도와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평양에 머물던 선조는 급하게 몽진을 떠나야 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려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아 의주에 머물렀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임진강 방어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까? 도원수 김명원? 도체찰사 한웅인? 그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 그러나 진짜로 책임을 물어야 할 자는 따로 있다. 임진강 방어전에 사사건건 간섭한 비변사이다. 그리고 조선의 유능한 지휘관과 용감한 군인들을 마치 쓰레기처럼 버린 선조이다.

임진강 방어 전투는 사공이 많은 전투였다. 그 결과 배가 산으로 갔다. 유능한 지휘관을 잃었고, 정예부대도 잃었다. 선조는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3] 영웅의 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