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정직

수필 임진왜란 제2부

by 수필가 고병균

전세의 역전인가? 승전보가 잇따라 날아든다. 해상 전투에서는 물론 육상 전투에서도 승전보가 속속 날아든다. 어떤 전투였을까?


해상 전투에서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다.

5월 29일(7월 8일), 사천 해전(泗川海戰)은 거북선을 최초로 투입한 전투이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왜 수군 13척을 전멸시켰다. 6월 2일(7월 10일), 당포 해전(唐浦海戰)에서는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연합 함대가 경상남도 노화읍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했다. 6월 5일, 당항포 해전(唐項浦海戰)에서도 조선 수군은 왜선 7척을 격파했다. 6월 7일, 율포 해전(栗浦海戰)에서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 함대가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적 함대 대선 5척과 소선 2척을 공격하여 대선 2척과 소선 1척은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았다.


육상 전투는 어떠했을까?

6월 5일(7월 13일), 용인 전투(龍仁戰鬪)는 치욕의 전투였다. 전라감사 이광이 거느린 8만 명의 조선군이 불과 1,600명의 왜군에게 대패한 부끄러운 전투이다.

그런가 하면 무계 전투에서는 의병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6월 5일 밤에 벌어진 제1차 무계 전투가 빛난다. 손인갑과 정인홍의 부대는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 머문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초병 2명의 목을 베고 대기병실에서 나오는 왜병 30여 명을 참살했으며, 병사 안에서 일어난 불길이 본진으로 번지자 당황하여 밖으로 나온 적병 100여 명을 사살했다. 왜군 부장 무라카미는 온몸에 10여 대의 화살을 맞은 채 도주했다. 그 공으로 손인갑은 동래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기 전에 전사했다. 정인홍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한다.

6월 18일에 벌어진 제2차 무계 전투는 김면의 의병군이 낙동강을 통과하던 왜선 두 척을 포획한 전투이다. 그 배에는 세조의 광묘(光廟), 어휘가 적혀 있는 금지장자(金紙障子) 곧 방과 마루 사이에 칸을 막아 끼우는 문, 제복(祭服) 두 벌, 왕이 정복을 입을 때 신는 붉은 신 적석(赤舃) 두 켤레 등 진귀한 물품이 있었다. 그것들을 ‘개산포 대첩의 노획품’이라 하고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내졌다.


여기에 의병장 김면과 초유사 김성일이 등장한다. 그들은 누구일까?

의병장 김면은 명종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된 인물이다. 효렴이란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와 청렴한 자를 각 1명씩 천거하여 벼슬을 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김면은 사퇴하고 말았다. 선조 즉위 초에도 ‘유일’로 천거되어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유일’이란 유능하지만, 관직에 등용되지 아니한 자를 천거하는 제도인데 또 사퇴하였다. 이랬던 김면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을 이끌고 우지(牛旨)에서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 명과 대치하였고, 지례(知禮)에서는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의 선봉을 역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김면은 합천군수가 되었고, 무계(茂溪)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그는 선산의 적을 격퇴하려고 준비하던 중 병사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초유사 김성일은 사회 교과서에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부사의 자격으로 다녀왔다. 그런데 그의 보고는 정사 횡윤길의 보고와 달랐다. 서인에 속한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 하며 ‘도요토미는 안광(眼光)이 빛나고 담략(膽略)이 있어 보인다.’라고 보고했다. 반면 동인에 속한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할 낌새는 전혀 없었으며, 도요토미의 사람됨도 쥐와 같이 생겨서 전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라고 보고했다.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이 무엇일까? 일본이 침략할 뜻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 황윤길의 보고가 합리적이다. 그것을 종사관으로 참여한 허성(許筬)이 증명했다. 그는 동인에 속했음에도 서인 황윤길의 보고를 편들었다.

한편 김성일은 부사이다. 따라서 정사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순리(順利)다. 그런데 정사 황윤길과 전혀 다른 내용을 보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정사 황윤길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그에게는 부사로서의 겸손함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통신사로서의 체통도 지키지 아니하였고, 통신사의 파견 목적 따위는 안중에 없었음을 말해준다. 오로지 당리당략만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의사결정의 최고 책임자는 선조다. 그는 정사의 보고를 채택해야 옳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할 것이 없다.’라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에도 맞다. 그게 순리에 맞고 대신들의 논란을 잠재우는 길이요, 종묘사직을 지키는 지름길이 된다.

그런데 선조는 정사의 보고를 제치고 부사의 보고를 채택했다. 거기에는 김성일과 같이 동인에 속한 영의정 류성룡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된다.


역사학자들은 ‘정사 황윤길의 보고는 정직한 보고였고, 부사 김성일의 보고는 거짓 보고였다.’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가치관이 온전한 왕이라면 정직한 보고자 황윤길에게 상을 내려야 하고, 거짓 보고자 김성일에게는 벌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선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벌 받을 자 김성일에게는 초유사라는 벼슬을 내리고, 경상도 지역을 설치며 돌아다니게 했다. 반면 상 받을 자 황윤길은 어디로 갔는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은 정직이다. 모든 백성이 정직하게 행동해야 한다. 대신들의 정직이 중요하고 왕의 정직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임진왜란이 강조하여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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