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10부
고흥 쌍충사(雙忠祠)에서 녹도 만호를 만났다. 두 분이나 만났다. 만호(萬戶)는 고려의 충렬왕 때 처음으로 등장한 군사 조직이다. 조선 때에는 각 도의 진(鎭)에 배치한 종4품의 무관 관직으로 육군의 병마만호(兵馬萬戶)와 수군의 수군만호(水軍萬戶)로 구분한다. 병마만호는 평안도, 함경도에 일부 설치되었고, 대부분은 수군만호로 운영되었다. 내가 근무했던 장흥군 회진면에 회령진성의 터가 남아 있고, 거기에 수군만호가 근무했다고 전한다.
우리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로 만호 관직 역임자가 있다. 고려 시대인 1361년 동북현상 만호를 역임한 이성계, 조선 시대인 1581년 발포(수군) 만호와 1587년 조산보(병마) 만호를 역임한 이순신이다. 쌍충사에서 소개하는 이대원(李大源)과 정운(鄭運)은 녹도(수군) 만호를 역임했었고, 또 다른 인물로 송희립은 지도(수군) 만호를 역임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녹도(수군) 만호 이대원(李大源) 장군 상과 정운(鄭運) 장군 상이 현충탑 오른쪽에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따로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나이는 만 나이가 아니니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대원 장군은 함평 사람이다. 1583년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6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선전관이 되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이대원 장군이 녹도 만호에 부임한 해는 22세 때인 1587년이다. 그해 음력 2월 10일, 남해안에 왜구가 출몰했다. 녹도 만호 이대원은 즉시 출동하여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왜구를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왜구의 우두머리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岩)에게 보고했다. 이 전투를 제1차 손죽도 해전이라고 한다. 손죽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딸린 작은 섬이다.
심암은 엉뚱하게도 이대원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여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대원의 공(功)을 자신에게 돌리라’고 강요했다. 상사가 이러면 그 조직은 건강할 수 없다. 슬픈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이레가 지난 2월 17일, 전열을 정비한 왜구가 또 공격해 왔다. 이게 제2차 손죽도 해전이다. 심암은 이대원에게 ‘왜구를 격퇴하라.’라고 명령했다. ‘지원병을 보내준다.’는 달콤한 약속도 했다. 상사로서 당연한 명령이다. 이대원은 즉시 출동했다. 그러나 지원병은 오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어도 오지 않았고, 적선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싸우고 있어도 오지 않았다. 결국 이대원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지원병을 보낸다.’라는 심암의 약속은 빈 약속이 되고 말았다.
왜구의 수장은 이대원에게 ‘항복하라.’라고 종용했다. 안내문에는 ‘제1차 손죽도 해전에서 보여준 그의 전투 능력을 왜군 수장이 아깝게 여겼다.’ 그리고 ‘그의 요구를 거부한 이대원은 돛대에 묶인 채 살해되고 말았다.’라고 소개한다.
이대원의 죽음은 성경의 인물 우리아의 죽음과 너무나도 닮았다. 제1차 손죽도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이대원, 다윗을 따르던 37 용사 중의 하나인 우리아, 이 두 사람은 정의롭고 충성스러운 부하라는 점에서 똑같고, 이대원의 여인을 탐한 심암이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겁탈한 다윗은 그들의 상사라는 점에서 같으며, 모함의 원인이 여인에 대한 탐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같고, 격렬한 전투에 투입하여 그들을 죽게 한 방법도 같다. 이런 자는 필연적으로 벌을 받는다. 사람의 벌을 받기도 하지만 하늘의 벌을 받게 된다. 그게 세상의 이치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대원 장군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떤 말로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
정운 장군, 그의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자는 창진(昌辰)이다. 1543년(중종 38년) 전남 영암(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훈련 참군 정응정(鄭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순신보다 2년 상이다. 1570년(선조 3), 28세로 식년과에서 병과(무과)로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 금갑도 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 함경도 거산찰방(居山察訪)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웅천포 현감으로 승진했다.
정운 장군이 녹도 만호(鹿島萬戶)가 된 해는 1591년이다. 그 이듬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휘하에서 해상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함께 이순신에게 다음의 말로 진언했다.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습니다. 적의 예봉을 꺾어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 결사적으로 임할 것’을 다짐한 말이다. 그의 말은 머뭇거리던 이순신의 출정을 강요했었고, 결국 해상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92년 음력 5월, 옥포(玉浦) 해전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였고, 같은 달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사르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노량진 전투는 소규모 해전으로 1598년 12월에 벌어진 노량해전이 아니다. 7월의 당포(唐浦) 해전, 8월의 한산 해전 등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해 9월, 부산포 해전에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 나섰다가 부산 물운대에서 적의 포탄에 맞아 순절했다. 이순신 장군은 서둘러 그의 위패를 함양하였다고 전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복하라. 그리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라.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라.”
성경에서는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대원 장군은 상사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와 다른 사례도 있다. 청소년 시절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벤허’의 주인공 벤허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인물이 있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죽이라고 했던 선조의 명을 거부하고 소신을 지켜 판결한 오리 이원익이다. 이들도 상전에게 순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