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맹장 김시민 장군에게서 군대 개혁의 실제를 배운다. 그것은 유비무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김시민은 1578년 25세에 무과(원시)에 급제해 겸사복이 되었고, 1583년 30세에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전했으며 1584년 31세에 무과(대과)에 급제하여 종6품 훈련원 주부 벼슬에 올랐다.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관한 의견’을 병조에 제출했다. 그가 추진하려는 군대 개혁은 여진족 니탕개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조정에서는 그 의견을 받지 않을 게 뻔했다. 이보다 먼저 1583년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대신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병조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 ‘평화의 시기’라는 핑계를 대며 핀잔을 주었다. 김시민은 격분했다. 여진족 니탕개의 침략이 있었고, 녹둔도 전투도 있었다. 그런데 ‘평화의 시기’라고 말하는 조선의 대신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땅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린 채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며 선조의 눈치만 살피는 자들이다.
1590년, 선조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그 결과 정사 황윤길은 ‘침공할 의사가 있다.’라고 보고한 반면 부사 김성일은 ‘침공할 의사가 없다.’라고 보고했다. 완전히 다른 보고다. 통신사를 보낸 목적은 무엇인가? 일본이 침략할 의사가 있는가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할 정사 황윤길의 의견을 채택해야 옳다. 그런데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채택하고 말았다. 그들에게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은 추호도 없었다. 오로지 당리당략만 있었을 뿐이다.
선한 목표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 김시민에게도 군대 개혁의 기회가 주어졌다. 1591년 그의 나이 38세 때 진주 판관에 제수되었다. 그때는 군대 개혁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왜적으로부터 진주성을 지키는 일이요, 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진주 목사 이경은 진주성을 떠나 지리산으로 피신해 있던 중 병사했다. 초유사 김성일이 김시민에게 목사를 대리하라고 명령했다.
목사 대리 김시민은 지체(遲滯) 하지 않고 성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추구하는 군대 개혁은 지휘관이 성안으로 들어가야 가능하다. 그것이 개혁의 시작이다.
김시민은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성채(城砦)를 보수하고, 군사훈련을 통해 군대 체계를 갖추었다. 이것은 유비무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요, 성민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진주성의 방비가 허술함을 알고, 왜군이 몰려왔다. 창원으로부터 몰려오고, 진해로부터 몰려오고, 고성으로부터 몰려와서 사천에 집결했다. 그는 무작정 기다리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다.
지휘관이 앞장서면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난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합세하고, 의병장 이달이 합세하고, 곽재우도 합세했다. 그들은 중간에서 적을 요격하고, 패주 하는 저들을 추격하여 고성을 수복하고, 창원도 수복했다.
의병장 김면으로부터 구원병의 요청을 받았을 때도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거창의 사랑암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김시민은 일본의 침략을 기다리지 않고 지휘관이 앞장서고 솔선수범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592년 (음 7월 26일) 진주 목사로 승진했다.
김시민은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했다. 염초(焰硝)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따로 부대를 배정하여 숙달시키며 유비무환의 정신을 실천했다. 목사로 승진한 이후에도 그에게서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선조 임금이 있는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금산(金山)에서도 적을 격파했다. 전투에서 지휘관이 앞장서면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진다. 이게 군대 개혁의 본질이다.
1592년 11월 8일(음 10월 5일), 일본군 2만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으로 쳐들어왔다. 이들과 맞서 싸운 조선군은 불과 4,000명이다. 김시민은 이들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다. 격렬한 전투가 5일 동안 이어지다가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왜군이 물러났다.
이날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날이다. 이로써 김시민은 군대 개혁의 1차 목표를 달성했다.
그날 오후, 김시민은 시체가 즐비한 전장을 둘러보았다. 그때 어디에선가 ‘땅~’ 하는 총성이 울리고 김시민은 쓰러졌다. 시체 사이에 숨어있던 왜군의 총탄에 맞은 것이다. 향년 39세였다. 진주성 백성은 오열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11월의 태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붉게 물들였다.
김시민의 용맹은 일본군도 인정하여, 그에게 ‘맹장’이란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여기서 잠깐 김시민의 군대 개혁이 성공한 요건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목사 대리 김시민은 지휘관으로서 지리산에 머물지 않고 진주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개혁의 목표를 설정하고 구체적인 과제를 설정하여 실천했다. 솔선수범하고 진두지휘했다. 그것은 성민을 안심시키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니까 김시민이 말하는 개혁은 유비무환의 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개혁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 개혁의 성공 모델을 420여 년 전에 살았던 진주 목사 김시민에게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