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조선 왕조에 반기를 들다

수필 임진왜란 제3부

by 수필가 고병균

함경도에서 조선 왕조에 반기를 든 세력이 나타났다. 함경도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위치가 한반도의 북쪽으로 전라도와 완전 반대이다. 이런 지역에서는 조정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흔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 등 제2군에게 함경도 점령을 맡겼다. 가토 기요마사 군은 안변에서 10여 일 머무른 뒤 북진했다. 안변은 당시 함경도에 속했으나 현재의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강원도에 속한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면 반기를 든 자가 기승을 부린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이 일본군을 상대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을 보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다. 기요마사 군은 거침없이 북진하여 영흥에 도착했다. ‘영흥’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명명한 지명이다. ‘영원히 흥하라’는 의미로 지은 지명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불같이 화를 내서 ‘금야’로 바뀌었다.

거기에 ‘두 왕자는 이 길보 북행했다.’라는 방문(榜文)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길보’란 보의 이름일까?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가토 기요마사는 나오시게에게 영흥과 함흥 인근의 수비를 맡기고 북으로 진군했다. ‘함흥’은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로 평양, 남포에 이어 북한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다.

가토 기요마사는 북진하여 ‘북청’에 이르렀다. 북청의 북쪽은 높은 산간 지역이고 남쪽은 바다이다. 그 바다는 한반도의 동해에 해당되지만, 북청에서는 남해라고 부른다. 북청사자놀이의 그 북청과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거기에 요리후사를 남겨두고 떠났다.


기요마사 군은 북진했다. 오른쪽은 동해, 왼쪽은 함경산맥 그 사이의 평야지대로 북진했다. 음력 7월 15일~16일경 ‘단천’에 도착했다. ‘단천’은 함경북도와 경계를 이룬 지역이다, 기요마사는 그의 가신 구키 히로타카[九鬼広隆]에게 그곳의 수비를 맡기면서 인근 은광의 굴착을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북진을 계속했다.


그즈음 임해군(臨海君), 순화군(順和君)은 근왕병을 모집하려고 함경남도에 와 있었다. 그때 일본군이 다가오자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을 넘어 회령에 들어갔다.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은 백두산에서 량강도 북동부를 통과한 뒤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도계(道界)를 따라 동해안까지 내려오는 산맥으로 표고 2,309m의 두류산(頭流山)에서 함경산맥과 교차한다.

함경산맥(咸鏡山脈)은 함경북도의 북동쪽 경원군 운무령(雲霧嶺, 526m)에서 남서쪽 낭림산맥까지 이어지는 산맥으로 한국 제2의 고봉인 관모봉(冠帽峯, 2,541m)을 비롯하여 표고 2,000m 이상 되는 산이 72개나 있다.


기요마사 군이 다가오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韓克諴)이 나섰다. 니탕개의 난과 녹둔도 전투 등 여진족과 분쟁이 자주 일어난 육진으로 용감한 군사를 결집하였다.

한극함은 마천령에 의거하려 했으나, 기요마사 군이 먼저 마천령을 넘어 진격하였다. 7월 17일(8월 23일) 새벽, 해정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를 해정창 전투(海汀倉戰鬪)라고 한다. 해정창은 함경북도 남쪽에 있는 도시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 사령관으로 참전 중 사망한 김책의 이름을 따서 1953년에 김책시(金策市)로 개칭되었다.

조선군이 기병으로 다가오자 일본군은 조총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 이하 300여 명이 전사하였다. 한극함은 다음날 공격하려 했는데, 그날 새벽, 일본군이 먼저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한극함은 크게 패하여 경성으로 돌아갔다.


기세등등한 기요마사 부대는 길주, 명천을 거쳐서 경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부령을 지나 7월 22일 고풍산에 도착하였고, 23일 회령에 도착했다. 이때 회령 부사 국경인(鞠景仁)이 투항했다.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묶어 일본군에 투항했다. 그들을 따르던 신하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黄廷彧), 황정욱의 아들이자 순화군의 장인인 황혁(黄赫) 등은 물론 회령 부사 문몽헌, 남병사 이영(李瑛), 온성 부사 이수(李銖), 경성판관 이홍업(李弘業) 등 20여 명의 지방관도 포로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왕조에 반기를 든 자가 나타나자 아예 일본군에 귀순한 자도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을 포박하여 일본군에게 보내는 조선인들이 앞을 다투었다.

함경도 전 감사 류영립(柳永立)은 백운산에 숨어 있었는데, 현지의 조선인이 일본군을 이끌고 가서 생포하였고, 함경 남병사 이혼도 갑산으로 피했으나, 현지의 조선인들이 그를 죽이고 수급을 일본군에게 보냈다. 한극함까지 포박하여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함경도 일대는 완전히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기세등등한 가토 기요마사는 여진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세워 종군을 원하는 조선인들을 불러 모았다. 음력 8월 회령의 조선인 3,000명을 선봉으로 일본인 8,000명의 진용을 갖추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 오랑캐(兀良哈) 땅으로 쳐들어갔다.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땅에서 호랑이 사냥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고 있다.


함경도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해야 한다. 일본군에 귀순한 순왜, 조선의 왕자와 관리들을 일본군에게 넘겨준 자 등 왕조에 반기든 자들을 척결해야 한다.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민족의 영웅이 나타나야 한다. 이런 바람이 좀처럼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안타깝고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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