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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1. 2023

[3-5] 조선 왕조에 반기를 들다

수필 임진왜란

좌의정 윤두수를 생각해 본다. 그는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 자이다.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에 올랐다. 선조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할 때 윤두수는 반대하며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했다. 거기서 피란할 때에도 함흥 피난을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했다. 함흥이 함락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는 평양성을 탈환해야 한다. 선조에게는 가장 시급한 일이다.     


8월 23일(7월 17일),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게 제2차 평양성 전투인데, 두 번의 실수가 있었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과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 병력이 있었는데 그중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이 황해도로 옮겨갔다. 이것을 본 척후장 순안군수 황원이 ‘주력 부대가 빠져나갔다.’라고 보고했다. 이게 첫 번째 실수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에 도착했을 때, 성문이 열려 있고 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해야 할까? 아니면 뒤로 물러나서 상황을 살펴야 할까? 명의 선봉장은 성급하게 진격하고 말았다. 공(功)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이게 두 번째 실수다.


이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부상당한 명나라 장수 조승훈은 남은 병력 수십 기만 이끌고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군을 얕보았던 게 틀림없다.     


한편 일본군 제2군 소속 장수 가토 기요마사는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 등과 함께 함경도로 진격했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은 병사를 이끌고 나아갔으나, 일본군 선두의 병사를 보고는 요격하려는 마음이 사라졌는지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韓克諴)이 이끄는 조선군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8월 23일(7월 16일), 그날 새벽에 벌어진 전투에서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 이하 300여 명이 전사했다. 지금의 김책시인 해전창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해전창 전투(海汀倉戰鬪)라고 한다. 다음 날인 8월 24일(7월 17일) 전투에서도 크게 패했다.     


기세가 등등해진 기요마사 부대는 길주, 명천을 거쳐서 경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부령을 지나 (음 7월 22일) 고풍산에 도착하였고, 23일 회령에 도착했을 때, 회령 부사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묶어 일본군에 투항했다. 그들을 따르던 신하,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黄廷彧) 황혁(黄赫, 황정욱의 아들 순화군의 장인), 회령 부사 문몽헌 남병사 이영(李瑛) 온성 부사 이수(李銖) 경성판관 이홍업(李弘業) 등 20여 명도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조선 왕조에 반기를 든 자가 나타나자 아예 일본군에 귀순한 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을 포박하여 일본군에게 보내는 조선인들이 앞을 다투었다. 함경도 전 감사 류영립(柳永立)은 백운산에 숨었는데, 현지의 조선인이 일본군을 이끌고 가서 생포하였고, 함경남병사 이혼은 갑산으로 피했으나, 현지의 조선인들이 그를 죽이고 수급을 일본군에게 보냈다. 한극함까지 포박됨으로 함경도 일대는 일본군에게 완전히 점령되었다.     


한극함은 누구인가? 그는 경원 부사, 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그가 해전창(海汀倉)에서 가토(加藤淸正)의 군사와 싸울 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놓아둔 채 단신으로 탈출했다. 오랑캐 마을 서수라(西水羅)로 도주했으나, 그들에게 붙들려 경원부로 호송되었고, 가토의 포로가 되었다. 먼저 포로가 된 두 왕자, 그리고 그들을 호행하던 대신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안변으로 호송되었다. 이듬해 4월,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할 때 단신으로 탈출하여, 고언백(高彦伯)의 군진(軍陣)으로 돌아왔으나 거기서 처형당했다.     


신라의 장수 김유신은 전투에서 패한 자기 아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왕에게 진언했다. 이런 이유라면 해전창 전투에서 패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도 처형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없다. 두 왕자를 묶어 항복한 회령 부사 국경인에게도 그렇다. 책임은 일본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한 자에게 물어야 한다.      


300년이 지난 1910년 일본의 군사적인 침략이 있었다. 그들은 36년에 걸쳐 우리 민족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었다.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군사적 침략 외에도 경제적 침략, 외교적 침략을 서슴지 않는다. 저들은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국경인처럼 왕조에 반기를 드는 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리석은 내 생각으로는 백성의 삶에 거룩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거룩한 목표란 나라에 유익하고 백성에게도 유익한 목표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그런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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