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지례 전투의 영웅들

수필 임진왜란 제4부

by 수필가 고병균

의병이 승리한 전투가 또 있다. 바로 지례 전투이다. 지례는 경상북도 김천의 서쪽에 위치한 면소재로 조선 시대에는 독립된 현이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 성주의 경계까지 13리, 서쪽 무주현의 경계까지 38리의 위치에 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요, 문화유적으로 지례향교가 유명하다.


지례 전투에 앞서 우두령 전투를 알아야 한다. 우두령(牛頭嶺)은 ‘소머리재’로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과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사이에 있는 소백산맥의 고개로, 해발 고도 580m이다. 지방도 제1099호선, 옛 국도 제3호선이 통과한다.

전라도 점령의 임무를 맡은 왜군 제6진 고바야가와 군 1만 5000명이 지례·김산·선산·성주 등지에 분산 주둔하면서 거창과 무주를 거쳐 전라도 진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7월 17일 지례·김산에 주둔하던 1,500명의 왜군이 거창으로 향한다는 정보가 고령에서 거병한 김면(金沔)에게 들어왔다.

의병장 김면은 좌부장에 황응남, 우부장에 김준민, 복병장에 이형, 종사관에 곽준·문위를 임명하고 우두령 고개 양편에 매복시켰다.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숨어 있다가 일시에 기습하는 작전을 폈다.

왜군이 우두령 산마루를 넘는 찰나 의병들이 한꺼번에 활을 쏘며 공격했다. 길 양쪽 산 위에서 공격했다. 제포 만호였던 좌부장 황응남은 황산에 숨었던 불명예를 씻고자 힘써 큰 공을 세웠다. 거창에서 의병을 모아 김면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변훈은 우두령 전투에서도 여전히 선봉에서 싸웠다. 우부장 김준민은 대궁(大弓)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복병장 이형도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사했다.

우두령 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헌한 무라가 있었다. 그들은 산척 곧 산에서 사냥이나 약초 채취로 생업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산지를 이용해서 익숙한 궁술로 많은 적을 무찔렀다. 그 활약이 컸었다.

왜적들은 속구무책 참살당했다. 살아 남은 일부는 다시 지례로 되돌아갔다.


일본군 고바야가와 부대도 창원에서 남원으로 직행하다가 의령에서 거병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에게 의령·삼가·합천에서 막혀 지례·김산·선산·개령 등지에 흩어져 일부는 지례로 후퇴했다.

또 다른 왜군 부대가 황간·순양·무주·금산을 거쳐 전주로 가던 중 권율(權慄) 장군에게 패하여 대덕·지례로 후퇴했다.

이리하여 지례 향교에는 왜군 1,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소풍 나온 것이 아니다. 조선의 의병에 쫓겨 왔다. 그래서 몹시 피곤하다. 몸에 지닌 행장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조총도 내려놓고 드러눕는다.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592년 7월 29일(9월 4일), 의병 연합군이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주변에 장작을 쌓고 불을 질렀다. 향교 건물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깜짝 놀란 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옷에 불이 붙었다. 그것을 끄려고 발버둥이다. 의병들은 그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왜군은 불에 타 죽고 화살에 맞아 죽었다. 도망자가 10여 명 있었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혀 죽었다. 지례 전투의 전말이다.


전투가 끝난 직후 의병 총대장 김면(1541년 52세)은 합천군수 배설(裵楔, 1551년 42세)에게 ‘왜병을 추격하라.’라고 명했다. 배설은 응하지 않았다. ‘수령으로서 어찌 백면서생인 김면의 지휘를 받으랴!’ 이런 생각이었다. 그는 스스로 추격하지도 아니하였고, 다른 사람이 추격할 기회마저 잃게 했다. 배설은 나중에 곤장을 맞았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 당시 패색이 짙어졌을 때 전함 12척을 이끌고 탈영했다. 나중에 그 배를 이순신에게 인계함으로써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명량 해전에서 또 탈영하였다. 기회주의자로 여겨진다.


어쨌든 지례 전투의 영웅은 의병장 김면과 곽재우 그리고 권율 장군이다. 그런데 나의 이 글을 ‘삼류’라고 비난하는 자가 있었다. ‘권율을 영웅’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다

임진왜란의 영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순신, 김시민, 권율 등 셋을 꼽는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권율의 공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권율의 아버지는 영의정이었고, 사위는 병조판서였다. 이런 이유로 논공행상을 논할 때 권율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권율의 공(功)은 다른 사람에 비해 부풀려졌던 게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권율은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 1,000명으로 왜군 10,000명을 물리쳤고, 독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 1만 명으로 왜군 2~3만 명을 물리쳤으며, 행주대첩에서 조선 관군 3,000여 명과 의병 6,000여 명으로 왜군 30,000여 명을 물리친 바 있다.

이런 권율을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쓸 수는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지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면, 곽재우, 권율 등 세 분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한 영웅이다.

이런 분을 400년도 더 지난 세대가 자기가 정한 잣대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작가로서 양심에 따라 쓴 글에 대하여 ‘삼류’라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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