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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1. 2023

4-2] 지례 전투의 영웅들

수필 임진왜란

의병이 승리한 전투가 또 있다. 

한양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이 전술을 변경하여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했다. 그것은 후방에서 일어난 의병들 때문이다, 이들은 평소 큰소리만 뻥뻥 치는 고관대작이 아니다. 이름 없는 잡풀에 불과하다. 이들을 향하여 민초(民草)라고 부른다. 그 민초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이 위태위태한 나라 조선을 구하려고 나선 영웅들이다. 이분들의 헌신이 눈물 나도록 숭고하다.      


일본군 고바야가와 부대가 창원에서 남원으로 직행하다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에게 막혀 지례·김산·선산·개령 등지에 흩어져 주둔했다. 지례군 (知禮郡)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으로 1914년 김천군에 통폐합되었다.

지례·김산의 왜군이 거창으로 향하다가 우두령에서 김면(金沔)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패하여 다시 지례로 되돌아갔다. 우두령 (牛頭嶺)은 ‘소머리재’로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과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사이에 있는 소백산맥의 고개로, 해발 고도는 580m이다. 지방도 제1099호선이 고개를 통과하며, 이는 본래 옛 국도 제3호선이었다. 

또 다른 왜적의 한 부대가 황간·순양·무주·금산을 거쳐 전주로 가던 중 권율(權慄) 장군에게 패하여 대덕·지례로 후퇴했다. 

이리하여 지례 향교에는 왜군 1,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행장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근무한 초등학교 중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1,200명이었다. 이들을 수용한 교실은 50개나 되었다. 운동장을 바라보고 2층의 본관 건물이 있고, 중간 건물과 후관 건물까지 세 겹이나 되었다. 당시 음력 7월이라 그리 춥지 않다. 아무 데서나 잠을 청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1,500여 명이 잠들어 있었으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으로 소풍 나온 것이 아니다. 조선의 의병에 쫓겨 왔다. 그래서 몹시 피곤하다. 몸에 지닌 행장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조총도 내려놓고 드러눕는다. 드르렁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들을 물리칠 절호의 기회다.     


그날은 1592년  7월 29일(9월 4일)이었다. 의병 연합군이 담장 안 창고 주변에 장작을 쌓아 불을 질렀다. 당시 건물은 벽돌이나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다. 그 재료는 온통 나무이다. 수년 동안 마른나무다. 향교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깜짝 놀란 왜군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피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옷에 불이 붙었다. 그것을 끄려고 발버둥이다. 그런 왜군을 향해 의병들이 화살을 날렸다. 왜군은 불에 타 죽고 화살에 맞아 죽었다. 도망자가 10여 명 있었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혀 죽었다. 

이게 지례 전투이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다. 속이 후련해진다.     

전투가 끝난 직후 의병 총대장 김면(1541년 52세)은 합천군수 배설(裵楔 1551년 42세)에게 ‘왜병을 추격하라.’고 명했다. 배설은 응하지 않았다. ‘수령으로서 어찌 백면서생인 김면의 지휘를 받으랴!’ 이런 생각이었다. 그는 스스로 추격하지도 아니하였고, 다른 사람이 추격할 기회마저 잃게 했다. 참 괘씸하다. 김면의 명을 수행하지 아니한 죄로 나중에 곤장을 맞았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 당시 원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패색이 짙어졌을 때 전함 12척을 이끌고 탈영했다. 나중에 이순신에게 인계함으로써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명량 해전에서 또 탈영하였다. 기회주의자로 여겨진다.      


지례 전투의 영웅 의병장 곽재우, 의병장 김면 그리고 권율 장군 등에 관해 따로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선한 싸움꾼, 권율’이란 글을 읽었다고 하며 ‘권율을 미화했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의 영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순신, 김시민, 권율 등 셋을 꼽는다. 그것을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권율의 공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권율의 아버지는 영의정이고, 사위는 병조판서였다. 이런 이유로 논공행상을 논할 때 권율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권율의 공(功)은 다른 사람에 비해 부풀려졌던 게 사실이다. 선조로부터 심하게 핍박을 받았던 이순신과 달랐고, '군대개혁에 관한 글‘을 병조에 제출했을 때 '쓸데없는 짓을 한다.‘라고 비난을 받았던 김시민과도 달랐다. 

그렇다 해서 ’권율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쓸 수는 없다. 작가로서 양심에 따라 쓴 나의 글에 대하여 ’삼류‘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지나치다.      


지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민족의 영웅 의병장 곽재우와 의병장 김면 그리고 권율 장군 등 세 분에게 감사한다. 그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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