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일본이 계속 밀고 올라오면 의주에 머물러 있는 선조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중국으로 망명하거나 일본군에 항복해야 한다. 그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상황에서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조선인은 참으로 놀라운 민족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채 두 달이 안 되었는데 그새 전투 요령을 습득하였꼬, 일본군의 허점을 노려 공격했다. 관군이 아닌 의병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해상 전투가 아닌 육상 전투에서 그랬다. 두 번이나 그랬다.
먼저 날아든 승전보는 영천성에서 벌어진 전투의 승전보였다. 이 전투를 ‘영천성 전투’ 또는 ‘영천복성 전투’라고 한다.
영천성은 개전 9일째인 4월 22일 함락되었다. 영천 군수 김윤국이 싸우지 않고 도망하여 일본군이 무혈입성 (無血入城)했다. 그 영천성을 탈환하기 위해 영천의 유학자 정세아(鄭世雅)와 정대임(鄭大任), 신녕의 무인 권응수(權應銖) 등 의병들이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전투 상황을 날짜별로 정리한다.
8월 29일(음 7월 23일), 영천 의병들은 읍성 남쪽 추평(楸坪) 현재의 주남들에 본부를 설치하고 관병과 의병 3,500여 명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의병대장 권응수, 별장 김윤국, 좌총 신해, 우총 최문병, 중총 정대임, 전봉장 홍천뢰(洪天賚), 찬화종사(贊畵從事) 정세아·정담으로 배치하는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을 조직했다.
의병대장 권응수의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은 무턱대고 공격하지 않고, 군기와 군율을 수립하였다. 다음은 권응수가 발표한 군율이다.
*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 적을 만났을 때, 다섯 걸음 이상 물러나는 자도 목을 벤다.
* 맡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장수의 명령을 듣지 않은 자도 목을 벤다.
* 적과 싸우는 도중 대열을 벗어나는 자도 목을 벤다.
다음으로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작전 계획을 논의했다. 영천 지역의 계절풍 ‘건들매’를 이용한 화공전(火攻戰)까지 계획했다. ‘건들매’ 또는 ‘건들바람’은 음력 7, 8월에 분다. 먼지가 일고 종이가 날리며 나뭇가지도 흔들릴 정도의 상당이 강한 바람이다.
이처럼 계획이 치밀한 전투는 당연히 승리한다. 이날 세 차례의 작은 전투가 있었다.
창암 전투에서 승리하여 경주와 안강 방면으로부터 영천의 왜군을 고립시켰고, 박연 전투에서 승리하여 저들의 보급로를 차단했으며, 겁림원 전투에서도 군위로 향하던 왜군을 소계역(召溪驛)까지 추격하여 격퇴했다.
이처럼 전투에서 승리하자 의병들의 사기를 높아졌다. 나아가 영천성의 복성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9월 1일(음 7월 26일)에 영천성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주력 부대는 동문과 남문을, 권응수와 박의장군은 서문과 북문을 공략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건들매’를 이용한 화공법도 펼쳐서 왜군을 섬멸시켰다.
9월 3일(음 7월 28일), 영천성을 탈환했다. 의병장 권응수는 조선인 포로 1,090명을 구해내고, 말 200필 총과 창검 900여 자루를 노획했다.
의병이 승리한 전투가 또 하나 있다. 한양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이 전술을 변경하여 전라도를 맡아 남하했다. 그것은 후방에서 일어난 의병들 때문이다,
고바야가와 부대가 창원에서 남원으로 직행하다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에게 막혀 지례·김산·선산·개령 등지에 흩어져 주둔했다. 지례·김산의 왜군이 거창으로 향하다가 우두령에서 김면(金沔)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패하여 다시 지례로 되돌아갔다. 또 다른 왜적의 한 부대가 황간·순양·무주·금산을 거쳐 전주로 가던 중 권율(權慄) 장군에게 패하여 대덕·지례로 후퇴했다. 이리하여 지례에 모여든 왜군 1,500여 명, 그들은 지례향교에서 행군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9월 4일 (음 7월 29일)이다. 의병 연합군이 담장 안 창고 주변에 장작을 쌓아 불을 질렀다. 찬고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우왕좌왕하는 왜군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거기서 도망친 10여 명도 멀리 못 가고 잡혀 죽었다. 정말 통쾌한 승리다. 이게 바로 지레 전투이다.
전투가 끝난 직후 의병 총대장 김면(1541년 52세)은 합천군수 배설(裵楔 1551년 42세)에게 ‘왜병을 추격하라.’고 명했다. 배설은 응하지 않았다. ‘수령으로서 어찌 백면서생인 김면의 지휘를 받으랴!’ 이런 생각이었다. 그는 스스로 추격하지도 아니하였고, 다른 사람이 추격할 기회마저 잃게 했다. 참 괘씸하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선 12척을 끌고 탈영한 인물이다. 그것을 이순신에게 인계하여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 이런 공이 있어도 그는 김면의 명을 수행하지 아니한 벌을 받아야 한다. 곤장이라도 맞아야 한다.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헌한 자는 영천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의병대장 권응수, 지레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자는 의병장 곽재우와 김면 그리고 권율 장군이다. 관군보다는 의병의 공이 크다. 이중 권응수에 대하여 따로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