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영천성의 탈환

수필 임진왜란 제4부

by 수필가 고병균

‘영천성 전투’ 혹은 ‘영천복성 전투’는 권응수의 군율이 빛을 발한 전투이다.

영천성은 개전 9일째인 4월 22일에 함락되었다. 영천 군수 김윤국이 싸우지 않고 도망하여 함락되었다. 그 영천성을 탈환하기 위해 영천의 유학자 정세아(鄭世雅)와 정대임(鄭大任) 그리고 신녕의 무인 권응수(權應銖) 등이 의병으로 나섰다.


7월 23일(8월 29일), 영천 읍성 남쪽 추평(楸坪) 현재의 주남들에 관병과 의병 3,500여 명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의병대장에 권응수를, 별장에 김윤국을, 좌총에 신해를, 우총에 최문병을, 중총에 정대임을, 전봉장에 홍천뢰(洪天賚)을, 찬화종사(贊畵從事)에 정세아·정담을 배치하는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을 조직했다.

의병대장 권응수의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은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율을 발표했다.

*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벤다.

* 적을 만났을 때, 다섯 걸음 이상 물러나는 자도 목을 벤다.

* 맡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장수의 명령을 듣지 않은 자도 목을 벤다.

* 적과 싸우는 도중 대열을 벗어나는 자도 목을 벤다.


이어서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작전 계획을 논의했다. 영천 지역의 계절풍 ‘건들매’를 이용한 화공전(火攻戰)까지 계획했다. ‘건들매’ 또는 ‘건들바람’은 음력 7, 8월에 분다. 먼지가 일고 종이가 날리며 나뭇가지가 흔들릴 정도의 상당이 강한 바람이다.


이처럼 계획이 치밀한 전투는 당연히 승리한다. 이날 세 차례의 작은 전투가 있었는데 조선 육군이 모두 승리했다. 창암 전투에서 승리하고, 박연 전투에서 승리하고 겁림원 전투에서 승리했다. 사기가 오른 의병군은 영천성의 복성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복재 정담의 《영천복성기》에 실린 영천성 전투의 양상을 날짜별로 소개한다. 군기가 바로 선 군대의 모습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1592년 7월 24일(8월 30일), 영천성 앞 들판에 진지를 구축한 아군은 목책을 두르고 허수아비를 세우며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권응수의 동생 권응평은 기병 500기를 지휘하여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권응수는 이날 자정, 야습을 감행하여 적들을 쏴 죽였다.

7월 25일(8월 31일) 새벽, 왜군이 물을 길으러 금호강으로 나왔다가 죽임을 당했다. 성 위에서 도발하던 왜장을 쏴 맞추는 쾌거도 이룬다. 한편으로는 사다리와 근접 병기를 만들고, 목책 사이에 흙을 채워 넣어 성벽과 맞먹는 높이의 토벽을 만들고, 마른 나뭇가지를 엮어 폭약을 장치한 ‘질려통’을 잔뜩 쌓아두었다. 권응수의 엄격한 군율은 병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7월 26일(9월 1일), 대규모 공격을 시작한다. 아군은 토벽에 올라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왜군들은 성 위에서 조총을 쏘며 반격했다. 한편 아군은 성문을 열고 유격대를 내보내 역습을 시도했다. 권응평과 이온수 등이 이끄는 기병 500기가 돌진하여 성을 나온 왜적들을 모조리 베었다. 군기가 바로 선 군대의 모습이다.

1천 명에 달하는 왜적이 성 위에서 총을 쏘아대고, 아군 활로 맞대응했는데, 활 솜씨가 좋은 사람을 토벽 위로 올려보내 화살을 날리게 했다. 권응수는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아 성 위의 적들을 하나둘 떨어뜨렸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7월 27일(9월 2일), 아군 중 1천 명에게 근접 병기를 나눠주고 영천성의 네 모퉁이에 배치했다.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 아군은 성문을 깨부수고 사다리를 기어오르며 공격했다. 왜적들은 사기를 잃고 꽁무니를 뺄 뿐이었다. 성벽을 넘은 아군은 화살을 퍼부으며 성 내부를 소탕했다. 왜적이 조총을 쏴보지만 건들매 바람이 거세게 불어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맞추지도 못했다. 아군이 휘두른 무기 앞에 조총은 무용지물이었다.

왜군 대다수가 창고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 틈에 아군은 포로 1천여 명을 구출하고, 창고 앞으로 불을 붙인 질려통에 불을 던졌다. 그것이 폭발하여 사방으로 불이 옮겨 붙었고, 왜적의 탄약고에도 불이 나서 폭발했다.

7월 28일(9월 3일), 드디어 영천성을 탈환했다. 3개월 만이다. 전투 결과 아군의 전사 83명, 부상자 2백여 명이었는데, 왜군들은 대부분 죽었다. 권응수는 수급 500여 두를 베고, 조선인 포로 1,090명을 구해내고, 말 200필 총과 창검 900여 자루를 노획했다.


영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의병대장 권응수를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권응수는 활을 잘 쏘았고, 특히 편전(애기살)에 능했다고 한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는 조선의 22대 왕 정조 연간에 왕명으로 만들어진 토속 인물지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숙종 때까지 조선의 역사 인물 2,065명의 인적 사항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다. 총 74권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5선 국회의원이었고,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권중돈은 그의 10대 후손이다.


어떤 학자는 권응수의 군율에 대하여 ‘이렇게 엄격해야 했을까?’ 하며 시비를 걸기도 한다. 임진왜란의 전투 중 승리를 거둔 부대는 모두 군기가 바로 선 부대였다. ‘영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의병장 권응수는 군기를 바로 세울 줄 아는 지도자다. 우리에게는 이런 지도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

군율이 엄격해야 하듯 나라의 기강도 엄격해야 한다. 운동 경기에서 선수들의 군율,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 사이의 군율,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군율 등 모두 엄격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나라, 건강한 사회, 건강한 학교, 건강한 국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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