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4부
1592년 9월에 접어들어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연전연패하던 육상 전투에서도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지는가 하면 빼앗겼던 성을 되찾기도 했다.
8월 1일(9월 6일)에 벌어진 청주 전투는 조헌의 의병과 영규 대사의 승병 연합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청주성을 탈환한 전투이다.
당시 청주에는 일본군 제3진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함락되었는데, 일본군 제5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머물다가 휘하 장수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맡기고 떠났다.
옥천 현감을 지낸 조헌은 유생들과 회동하여 옥천에서 봉기했다. 조헌은 차령 싸움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으나 이를 물리치는 투혼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군이 장악한 청주를 탈환할 목적으로 충청도 서남쪽 온양, 정산, 홍주, 회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했고, 영규가 이끄는 500명의 승병과도 합류했다. 이 소식을 듣고 충청도 방어사 이옥과 공주 목사 허욱의 관군도 합류했다.
이들은 조헌의 지휘를 받아 청주성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크게 패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깃발을 세워 군대가 있는 것처럼 꾸민 뒤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방어사 이옥은 엉뚱한 짓을 했다. 창고에 남겨진 곡식을 불태운 것이다. 의병들은 식사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8월 2일(9월 6일), 경주(慶州) 노곡(奴谷) 전투는 의병장 김호의 작전이 빛난 전투였다.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훈련봉사 김호는 ‘왜군 정병 500여 기가 경주로 간다.’라는 첩보를 접한다. 그는 경주 노곡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 공격했다. 왜군은 계곡으로 달아났고, 의병은 언덕 위에서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는 한편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9월 28일(8월 23일)에 벌어진 강원도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는 매복의 기본 전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 전투였다.
원주 목사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가리평에 매복하라.’라고 명했다. 박종남은 냇가에서 쉬다가 정찰을 나온 왜군 모리 요시나리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매복(埋伏)이란 상대편의 움직임이나 상태를 살피거나 불시에 적을 공격하기 위해 일정한 곳에 숨어 있는 전술이다. 따라서 ‘숨어 있어야 한다.’ ‘쉴 때는 보초를 세워야 한다.’ 이게 매복의 기본 전술이다. 박종남을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였다.
왜군 장수 모리는 병력 3,000명을 이끌고 영원산성을 공격했다. 원주 목사 김제갑은 활을 쏘며 분전했지만, 총탄에 두 번이나 맞고 전사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시백도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는 중에 총에 맞았다. 그 비보를 들은 김제갑의 처 이씨도 자살했다. 김제갑과 그의 아들 김시백 그리고 그의 처 이씨, 이들 가문에는 충효열 1문 3강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
영원성 전투의 패배 원인은 매복의 기본 전술을 소홀히 한 박종남이 제공한 것이다.
한편 조선 수군은 4차 출정에 나섰다.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등이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을 이끌고 부산포에 주둔한 일본 수군을 격멸하기 위한 출정이다. 그 과정에서 소규모의 해전도 있었다.
8월 29일(10월 4일), 양산강 쪽에서 만난 적의 함선 6척을 낙동강 하구로 유인하여 모두 불태운 장림포 해전이 있었다. 9월 1일(10월 5일) 하루 동안에 무려 6번의 해전이 있었다.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바다에서 함선 5척을 침몰시킨 화준구미 해전,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앞바다에서 왜선 8척을 격침시킨 다대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앞바다에서 군함 9척을 전멸시킨 서평도 해전, 부산시 영도구 앞바다에서 적 군함 2척을 전멸시킨 절영도 해전, 부산시 동구 초량동 앞바다에서 군함 4척을 전멸시킨 초량목 해전 등 5번의 소규모 해전에서 적의 함선 28척을 격침시켰다. 마지막으로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에서는 부산포에 정박 중인 왜군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왜선 100여 척을 불태우거나 파괴했다.
이 해전의 결과, 조선 수군은 남해의 해상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영향은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까지 미쳐 더는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붙들어 두었다. 진퇴양난에 처한 선조로서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에 대하여 고마움을 모른다.
일본군은 부산포 해전의 패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을 일으켰을 때 전혀 다른 전략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은 어떠했는가?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1594년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장 이산겸을 숙청했고,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광주 출신 김덕령을 죽였다.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은 전쟁으로 찌든 백성들을 위로하지 않으면서 애매한 장수만 죽였다.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진솔하게 따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40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떠한가? 반성하고 있는가? 국가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국회의원의 행태를 보면 반성하지 않는 못된 버릇은 여전하다. 남의 탓만 일삼고 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불법을 저지른 자에게 투표하지 않는데 그래도 불법을 저지를까? 남의 탓만 하는 자에게 투표하지 않는데 그래도 남의 탓만 할까? 거짓말하는 자에게 투표하지 않는데 그래도 거짓말을 일삼을까?
‘반성이 없는 민족에게 희망도 없다.’ 카톡으로 날아온 지인의 경고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