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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1. 2023

[4-3] 반성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

수필 임진왜란

1592년 9월에 접어들어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연전연패하던 육상에서의 전투도 승리의 개가를 울리는가 하면 빼앗긴 성을 되찾기도 한다.     


9월 6일(음 8월 1일)에 벌어진 청주 전투는 조헌의 의병과 영규 대사의 승병 연합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청주성을 탈환한 전투이다. 


당시 청주에는 일본군 제3진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함락되었었는데, 일본군 제5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머물다가 휘하 장수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맡기고 떠났다. 


옥천 현감을 지낸 조헌은 유생들과 회동하여 옥천에서 봉기했다. 조헌은 차령 싸움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으나 이를 물리치는 투혼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군이 장악한 청주를 탈환할 목적으로 충청도 서남쪽 온양, 정산, 홍주, 회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했고 영규가 이끄는 500명의 승병과도 합류했다. 이 소식을 듣고 충청도 방어사 이옥과 공주 목사 허욱의 관군도 합류했다. 이들은 조헌의 지휘를 받아 청주성을 탈환했다. 

안타깝게도 조헌과 영규 대사는 9월 23일(8월 18일) 금산 제2 전투에서 참패했다. 금산에는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무덤 ‘칠백의총’이 있다.


9월 6일(음 8월 2일), 경주(慶州) 노곡(奴谷) 전투는 의병장 김호의 작전이 빛을 발하는 전투였다.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전 훈련봉사 김호는 ‘왜군 정병 500여 기가 경주로 간다.’라는 첩보를 접한다. 그는 경주 노곡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을 기습 공격했다. 왜군은 계곡으로 달아났고, 의병은 언덕 위에서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는 한편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9월 28일(8월 23일)에 벌어진 강원도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에서는 원주 목사 김제갑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처가 충, 효, 열의 가문이었음을 보여준다.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가리평에 매복하라.’라고 명했다. 박종남은 냇가에서 쉬다가 정찰을 나온 왜군 모리 요시나리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매복(埋伏)이란 상대편의 움직임이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또는 불시에 적을 공격하기 위해 일정한 곳에 숨어있는 전술이다. 따라서 매복은 ‘숨어있어야 한다.’ ‘쉴 때는 보초를 세워야 한다.’ 이런 기본 전술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는 전투의 패배로 이어졌다. 


원주를 점령한 왜군 모리는 병력 3,000명을 이끌고 영원산성을 공격했다. 원주 목사 김제갑은 활을 쏘며 분전했지만, 총을 두 번이나 맞고 전사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시백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는 중에 총에 맞았으며, 그의 처 이 씨도 비보를 듣고는 자살했다. 


김제갑과 그의 아들 김시백 그리고 그의 처 이 씨, 이들 가문에는 충효열 1문 3강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     

한편 조선 수군은 4차 출정에 나섰다.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등이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을 이끌고 부산포에 주둔한 일본 수군을 격멸하기 위한 출정이다. 그 과정에서 소규모의 해전도 있었다.


10월 4일(8월 29일), 양산강 쪽에서 만난 적의 함선 6척을 낙동강 하구로 유인하여 모두 불태운 장림포 해전이 있었다. 10월 5일(9월 1일) 하루 동안에 무려 6번의 해전이 있었다.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바다에서 함선 5척을 침몰시킨 화준구미 해전,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앞바다에서 왜선 8척을 격침시킨 다대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앞바다에서 군함 9척을 전멸시킨 서평도 해전, 부산시 영도구 앞바다에서 적 군함 2척을 전멸시킨 절영도 해전, 부산시 동구 초량동 앞바다에서 군함 4척을 전멸시킨 초량목 해전 등 5번의 소규모 해전에서 적의 함선 28척을 격침시켰다. 마지막으로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에서는 부산포에 정박 중인 왜군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왜선 100여 척을 불태우거나 파괴했다. 


이 해전의 결과, 조선 수군은 남해의 해상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영향은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까지 미쳐 더는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붙들어 두었다. 진퇴양난에 처한 선조로서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일본군은 부산포 해전의 패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을 일으켰을 때 전혀 다른 전략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은 어떠했는가? 1510년 삼포 왜변, 1544년 사량진 왜변, 1555년 을묘왜변 등 왜변을 수차례 겪었고, 일본에 통신사까지 파견했으면서도 당파 싸움으로 일관할 뿐 나라를 위한 진정한 반성은 없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의 변을 당한 것이다. 


정말이지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은 자기반성이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400년이 지난 오늘날 국회의원 행태를 보면 나라의 안위나 국민의 삶은 안중에 없다. 자신의 권력만을 추구할 뿐이다. ‘반성이 없는 민족에게는 희망도 없다.’ 카톡을 날아든 지인의 경고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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