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명나라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4만 3,000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2차 지원병이다. 1593년 1월 15일(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군의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건넜고 1월 27일(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의주에 도착했다.
조선에서는 명나라 군대에게 식량과 전쟁 물자를 대주고 도원수 김명원과 우측 방어사 김응서, 좌측 방어사 정희현 등 8,000명의 군사를 주었다. 여기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도 합세했다.
그런데 이들은 도착하기도 전에 협상부터 제의했다. 시간을 끌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속이 상한다. 그래도 어찌하랴! 조선은 이들을 환영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1차 목표는 평양성 탈환, 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는 고니시 유키나가, 그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휘하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토모는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해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부터 9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제4차 평양성 전투라 한다.
2월 6일, 조명연합군은 진격 나팔을 불었다. 일본군도 평양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꾸미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했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이어서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차례로 공격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의 승병 부대는 싸우다가 패한 척 후퇴했다. 일본군이 추격하여 따라온다. 이때 돌아서서 반격했다. 매복조도 합세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반면 남쪽 함구문을 공격하던 이일과 김응서의 조선군 8,000명은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보았다.
2월 7일 새벽, 일본군 3,000명이 명나라의 양호, 이여백, 장세작 등의 진지를 기습 공격해 왔으나 물리쳤다. 조명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과 김응서의 기병대가 유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2월 8일, 조명연합군은 대공세를 가했다.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대포를 쏘아대며 평양성을 집중하여 공략했다.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의 군사가 공격하고,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이 공격에 나섰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했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자 다른 말로 갈아타며 군사를 지휘했다. 장수가 이렇게 분전하면 군사들도 사기가 오른다.
전세는 조명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진다.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했다. 일본군은 만수대와 을밀대 방향으로 쫓기고, 풍월정 아래에 굴을 파고 들어가 거기서 공격을 가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이여송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협상을 제시했다. ‘추격하지 않는다.’ 하고 퇴로를 열어주었다. 그날 밤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이 3,000명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왜군 358명을 사살했다. 조선군도 따라서 추격했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60명의 군사를, 황주 판관 정화는 12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왜군 538명을 사살했다.
2월 9일, 평양성을 완전히 탈환했다. 평양성을 빼앗긴 것은 순간이었는데 그것을 도로 찾는 데는 무려 7개월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피도 많이 흘렸다.
평양성에서 후퇴한 일본군은 한양으로 철수했는데, 1만 8,700명이었던 병력이 6,600명으로 감소해 있었다.
평양성 전투의 후유증도 컸다. 이 전투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명나라의 남병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약속한 은 ‘5,000냥을 주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이여송은 그 약속을 지키기보다는 ‘남병 1,300명을 죽이라.’ 하고 명령했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도 허약한 군사 60명을 죽였다. 공을 세우지 못한 것을 휘하 군사들의 탓으로 돌렸다.
2월 18일, 선조는 의주에서 남하를 시작했다. 영토가 회복되고 왕권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이여송 그는 해방군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해방군이 아니었다. 선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제독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조선 백성들을 많이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목을 베어 적의 수급으로 삼았다.’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1일 을사 2번째 기사)
이 사실을 조사하러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매우 사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적을 사로잡고 수급을 벤 것은 분명하게 조사해 올린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항변했다.
평양성을 탈환했지만, 약소국 백성이 당하는 설움은 크다.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