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덕형을 명나라 특사로 파견했다. 일본이 정명가도(征明假道)를 표명한 만큼 명나라도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는지 구원병을 보내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이 합세하여 명을 침공한다.’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지원을 끌어낸 데 숨은 공로자가 있다. 조선의 역관 홍순언이다.
역관이란 조선시대의 관리로 외국어 통역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당시 역관을 배출해 내던 기관은 ‘사역원’인데, 중국어, 위구르어, 일본어, 만주어(여진어), 몽골어, 유구어 등 6개의 외국어를 가르쳤다.
홍순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청나라에 갔을 때, 통주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술을 마시려고 기생집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백색의 상복을 입은 기생을 만났다. 그 상황을 대화체로 꾸며본다.
순언 “이건 상복이 아닌가? 무슨 일로 이런 옷을 입었는가?”
기생 “네, 저의 아버지는 남경의 호부시랑이셨는데, 공금횡령의 누명을 쓰고 옥사했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장례비용이 없어 기생으로 몸을 팔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호부시랑은 호부상서 바로 아래 벼슬이다.
순언 “음~ 그래,”
기생 “비록 기생이지만 첫 정만큼은 통이 큰 사내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홍순언이 기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순언 “작은 나라의 벼슬아치가 어찌 대국의 귀한 집 따님을 욕보일 수 있겠습니까?” (보따리를 풀어 무역자금 2천 냥과 인삼을 선물로 준다)
조선에 돌아온 홍순언은 공금횡령죄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조는 역관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엄포를 놓았다.
‘이번에도 종계변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역관들의 목을 치겠다.’
‘종계변무’란 ‘잘못 기록된 조선 왕실의 가계를 시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주청한 일’이다.
조선의 실록과 같은 역사 서적이 명나라에도 있다. ‘대명회전’이란 책이다. 거기에 오류가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부친은 ‘이자춘’인데 ‘이인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인임은 고려 말에 이성계와 권력을 다투던 정적이다. 이성계는 이 일을 바로잡으려고 사신을 보냈다. ‘고쳐 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들어주지 않았다.
선조는 역관들에게 그것을 기어이 해결하라고 강요한다. 역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들은 숙의 끝에 홍순언을 보내기로 하고, 횡령금 2천 냥을 대신 물어주었다.
그리하여 홍순언은 즉시 연경(북경)으로 떠났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의 예부시랑 석성이 홍순언을 마중 나온 것이다. 그의 부인 류 씨와 함께 나온 것이다. 명나라의 예부시랑은 오늘날 외무부 차관에 해당된다. 그런 자가 조선의 일개 역관을 마중 나온 사례는 없다. 더 놀라운 것은 200년이 넘게 끌어온 종계변무를 명나라가 불과 두 달 만에 해결해 준 일이다.
그동안 기생 류 씨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기생 류 씨는 2천 냥과 인삼을 팔아서 빚도 갚고 장례비용도 해결했다. 그래서 기생방에서 나왔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그녀는 고향을 떠나려고 했다. 가사를 정리하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예부시랑 석성에게 찾아가서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중병을 앓고 있는 석성의 부인을 간호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생 류 씨에게 행운이었다. 얼마 후 석성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석성은 정성을 다해 간호한 기생 류 씨를 자기의 계비(둘째 부인)로 맞이했다. 선행은 선행을 낳는다는 꿈같은 이야기다.
석성의 부인 류 씨는 날마다 비단을 짰는데, 거기에는 ‘報恩’(보은)이란 글자가 들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석성이 물었다. 류 씨 부인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석성은 ‘동방에도 그런 의인이 있는가?’ 하며 탄복했다. 류 씨는 그 비단 100 필을 선물했다.
비단 한 필은 세로 3자(약 90Cm) 가로 40자(약 12m)이다. 조선 시대 비단 한 필의 가격은 쌀 720Kg의 가격과 맞먹는다고 한다. 집 앞 마트에서 파는 쌀값은 20Kg에 5~7만원 정도, 평균 6만원으로 계산하면 비단 100필의 값은 2억 1,600만 원이다.
홍순언이 베푼 은혜는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더 큰 은혜로 돌아왔다.
선조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19명의 일행에게 광국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홍순언에게는 우림위장을 임명했다.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 사령관으로 종2품 벼슬이다. 역관으로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관직이다. 그리고 당릉군이라는 군호까지 하사했다. ‘군호를 받는다.’라는 것은 왕실과 한 핏줄이라는 의미다. 선조가 신하에게 베푼 최고의 대우이다. 선조는 홍순언에게 땅과 노비도 하사했다. 그 땅이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해당하며 당시에는 ‘보은단동’ 혹은 ‘보은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역관 홍순언의 선행이 기생 류씨의 마음을 움직였고, 류 씨의 성실한 봉사는 석성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석성의 강력한 주장은 명나라 왕과 대신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렇게 보면 명나라를 움직인 것은 역관 홍순언의 작은 선행이었다. 총이나 칼이 아니었다. 역관 홍순언의 선행이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성경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