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명나라 구원병이 조선에 들어와 한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성을 탈환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일본과 강화회담을 하는 일이었다.
그들 중 강화회담을 추진한 자는 심유경이다. 그는 1592년 10월 초,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하고, 50일 동안 휴전하자는 제안이었다. 일본 측도 이에 동의했다.
심유경은 병부상서 석성의 추천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유격(遊擊)이라는 직함을 달고 왔다.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파견되었으나 실상은 강화 사절이다.
심유경은 일본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접촉했으며, 1593년 일본까지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도 했다.
9월 11일(음 8월 17일), 심유경은 선조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명나라는 파병하려고 70만 명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거짓말도 했다. 이런 거짓말이 통할 수 없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과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고 강화회담이 이루어졌다. 1593년 3월의 용산 회담 이후 왜군은 포로가 된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를 돌려보냈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조선의 선조는 회담을 극구 반대했다. 일본군이 종묘를 불태운 것, 왕릉을 파헤친 것, 진주성 농민을 학살한 것 등의 이유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1597년 8월 말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을 때 명군은 그것을 반대했다. 일본군을 자극한다는 것이 반대 이유이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에게 강경한 지시를 내렸다.
“해안에 은거한 일본군의 퇴각을 저지하라.”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선조는 이순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선조는 이순신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 원균보다 월등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임진왜란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명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을 것이다. 이 일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삭탈관직의 벌을 두 번이나 내렸다. 1597년에는 이순신을 감옥에 가두고는 죽이려고까지 했다. 선조는 출정하는 신립에게 상방검을 하사하며 지휘권을 강화했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는 그런 것도 없이 백의종군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충성만 강요했다.
심유경은 선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진행했다. 159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일본의 도요토미는 강화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둘째 감합인(勘合印,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즉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셋째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넷째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줄 것
일본의 요구는 도무지 들어줄 수 없다. 그 심보가 고약하다. 명나라는 물론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까닭에 심유경은 전쟁 당사국인 조선을 배제한 채 회담을 진행했다. 따라서 ‘그들만의 강화회담’이 되고 말았다.
전쟁 당사국이면서 회담에서 배제된 사례는 또 있다. 1953년 한국전쟁 당시 휴전회담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도 북한은 미국과 대화하기를 원하면서도 대한민국을 배제하려 한다. 이 문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우리의 특별 과제이다.
심유경은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한다.’라고 거짓말로 보고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는 1596년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책봉한다.’라는 책서와 금인을 전달했다.
이와 관련하여 심유경이 거짓말이 들통난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의 현실성 없는 요구 등으로 협상이 난항을 겪자 심유경이 고니시와 공모해 문서를 조작했다. 그 문서를 사이쇼 조타이가 그대로 읽었다.
거짓말이 통할 리 없다.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였고,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런 심유경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병부상서 석성의 도움으로 죄는 면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려는 속셈으로 도망가다 경남 의령 부근에서 명의 장수 양원에게 잡혀 명나라로 압송되었다. 그는 황제와 조정을 기만한 죄로 참형에 처해졌다. 조선은 정유재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휴전이 지속되는 동안 조선이 전열을 정비한 것이다. 조선은 전쟁 무기와 화약을 발명하고, 함선도 건조했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고, 속오법을 시행하여 지방군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군대를 살수·사수·포수의 삼수기로 나누어 대비했다.
수군도 마찬가지였다.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된 지휘체계를 세우고 기지의 방비와 포구 간의 연락을 강화했다. 한편 축성 작업도 활발하게 벌여 남한산성·독산산성·무한산성·죽산산성 등을 새로이 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