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명군,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수필 임진왜란 제4부

by 수필가 고병균

명나라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숨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들추어 본다.


명나라 병부의 자문(咨文)은 조선 파병의 기본 입장을 보여준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4월 21일(신사) 기사 일부를 발췌하여 묵상해본다.


「대저 천하의 일이란 이름은 ‘절약한다.’ 하면서도 도리어 허비가 많고 이름은 ‘허비한다.’ 하면서도 절약이 갑절일 수도 있으니, 곧 오늘날 구원병을 보내는 것의 지속(遲速 : 더딤과 빠름)이 그러하다.」


여기서 ‘천하의 일’이란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하는 일이다. ‘지속’이란 구원병 보내는 시기를 말한다. 지원병 보내는 시기를 뒤로 미루면 바용이 덜 드는 반면 조선이 패망할 수 있다. 반면 그 시기를 앞당기면 그러면 비용이 많이 든다. 이런 논리다. 명나라는 구원병을 파견하되 그 시기는 조선이 망하기 전이어야 하고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야 한다. 그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야 한다.


「군병이 늦게 출발하면 행량은 좀 절약되겠지만 만약에 왜가 조선을 탈취하면 조선 땅이 일본에 보태질 것은 뻔한 일이요, 옛것을 다시 회복하기도 어렵거니와 회복한다 해도 힘이 갑절이나 많이 들게 되고 그 비용도 적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명에 미칠 화 또한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파병의 명분은 조선을 지원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하면 자국에 이익이 될까?’ 그것을 따지고 있다. 매사 자국의 손익에 따라 결정한다. 이것이 국제 질서이다.

매사에 때가 있다. 봄에는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는 거둔다. 그때를 놓치면 안 된다. 일본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면 의주의 선조는 더 피할 곳이 없다. 명나라로 망명을 하든지 아니면 항복해야 한다.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 명의 구원병이 도착했다. 일본군의 사기를 꺾는데 한몫했다.


1592년 7월 명나라는 요동의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의 지휘하에 정병 3천 명을 파견했다. 조승훈은 조선과 가까운 요동 동령위(東令衛)에서 복무했다. 병부상서 석성의 열변 덕분에 1차 파병이 이루어졌다.

명나라는 왜구를 깔보았다. 그래서 3천 명만 파견했다. 그리고 조승훈도 일본군을 쉽게 생각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라는 속담을 간과했다. 조승훈은 지피지기의 기본 원칙도 무시한 채 평양성을 공격했다.

전투 결과 명의 부장 사유를 포함해 절반이 넘는 병사가 전사했다. 조승훈은 압록강을 넘어 본국으로 도주했다.


명은, 그해 12월 2차 구원병을 파견했다. 이여송을 도독으로 하여 5만 대군을 파견했다. 이여송은 ‘보바이의 난(哱拜之亂)’을 평정하여 명성을 높인 장수로, 고구려 후예이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은 혹한을 무릅쓰고 평양성의 공격에 나섰다. 성안에는 일본군 1만 5천여 명과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불랑기포로 무장한 명군, 유격 전술을 날렵하게 전개한 승병들의 활약에 밀려 일본군은 토굴로 들어가 조총을 쏘며 저항했다. 외교에 능한 왜장 고니시는 ‘후퇴하는 길을 막지 말아달라.’고 요구했고, 이여송은 그에 응하였다. 마침내 평상성을 탈환했다. 명군이 파견되어 첫 번째 승전이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1월 18일 선조는 의주에서 남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승리에 자만했다. 그 결과 1593년 1월 27일(2월 27일), 벽제관 전투(碧蹄館戰鬪)에서 대패했다. 벽제관은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이다.

이후 이여송은 소극적으로 대항했다. 그러는 동안 무명(無名)의 조선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았고, 1593년 말에 철군했다. 그의 후손이 거제시에 살고 있다.


명나라 군대의 참전은 조선군의 사기를 높였다. 그러나 지원병으로 파견된 명군이 조선 백성에게 끼친 폐해는 엄청났다. 민간인 사이에서 ‘명나라 군대가 포악하다.’라는 소문이 퍼졌고, ‘명군은 참빗, 왜군은 얼레빗’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참빗은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대빗을 말한다. 우리 속담에 ‘참빗으로 훑듯’이란 말이 있다. 남김없이 샅샅이 뒤져내는 모양을 비유한 말이다. 얼레빗은 빗살이 굵고 성긴 큰 빗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본군에게 당한 피해도 컸지만, 명군에게 당한 피해가 훨씬 더 컸음을 의미한다.


《연려실기술》에 그것을 증명하는 내용이 있다.

「명군이 들어가는 마을에서는 소나 돼지, 개와 닭 같은 가축이 전부 없어진다. 명군은 닭을 가장 즐겨 피 한 방울이라도 버리는 것이 없다.」


조선의 백성은 참 불쌍하다. 평화 시에는 탐관오리들의 등쌀에 시달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행패로 눈물을 삼켰는데, 명군이 들이닥친 이후 그 행폐는 더욱 심각하다. 마을에는 가축 하나 남김없이 싹 쓸어가고 애매한 백성의 목을 벤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선의 아낙네들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한다. 하늘을 향해 가슴을 친다.

명군은 과연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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