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기질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일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은근과 끈기라고 배웠다. 그것을 증명하듯 조선의 백성들은 잡초처럼 일어났다. 관북지역을 회복한 정문부, 진주성을 끝까지 지켜낸 김시민, 독성산성을 사수한 권율, 이 세분은 조선인의 기질 은근과 끈기를 유감없이 보여준 유능한 장수였다.
1592년 10월 20일(9월 16일)부터 1593년 2월 28일(1월 28일)까지의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가 가토 휘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한성으로 철수하였고, 조선군은 관북(關北) 지역의 영토를 회복했다.
북관대첩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누가 뭐래도 정문부다. 그러나 그는 높은 벼슬을 제수(除授)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순찰사 윤탁연과의 갈등 때문이다.
윤탁연은 정문부를 향하여 ‘평사는 일개 막관(幕官)이니 마땅히 감사(監司)의 절제를 받아야 하고 서로 대등하게 대해서는 부당하다.’ 하고 꾸짖었다. 막관(幕官)이란 오늘날로 치면 참모를 의미한다. 그러면서 정문부가 세운 전공을 사실과 반대로 보고하고, 정문부의 부하로부터 수급을 빼앗아 자기 군사에게 주기도 했다. 심지어 정문부의 행동이 ‘법을 지키지 않고 반역을 꾀하는 등 불궤(不軌)스럽다.’라고 아뢰었다.
그 실상을 조사하러 조정의 사신이 왔다. 윤탁연은 그들에게 옷과 장비 등을 주며 사실을 왜곡했다. 뇌물을 받은 그들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윤탁연은 또 ‘관남’에 있는 자들에게 곡식을 베풀어 구제하는 등 사대부 가족들에게 환심을 샀다. ‘관남’이란 마천령 이남 지역을 말한다.
한번 구부러진 나무는 절대 바로 서지 못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윤탁연은 ‘상 받을 자가 상을 받게 하고 벌 받을 자가 벌을 받게 해야 하는’ 감사로서의 소임을 끝내 저버리고 말았다.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노현(露峴) 고개에 포진하고 있는 (음 9월 24일),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 병력 2만여 명이 서쪽으로 진격해 온다.’라는 소식을 들었다. 노현(露峴) 고개는 일본군이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충지다. 그날 오후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고 선봉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숭인은 ‘함부로 활을 쏘지 말라.’ ‘인기척을 죽이고 기다리라.’ 했다. 왜적도 급히 공격하거나 포위하지 못했다. 오후 4시경 적병 몇 명이 진 앞에 나타나 내부를 살피려고 기웃거렸다. 그때를 기하여 집중사격했다. 침착한 작전을 펼쳤다.
(음 9월 25일) 오전 10시경, 유승인은 무모하게 싸우지 않고, 창원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적병 80여 명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민가를 불태웠다. 유숭인은 크게 탄식하며 마산포로 철수했다. 백성의 안전을 고려했는지 몰라도 노현(露峴) 창원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지도력이 실망스럽다. 그 결과 창원성을 내주었고, 조선군 1,400여 명이 전사했다.
11월 13일(10월 10일)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 수성(守城)에 성공한 최초의 전투이다. 관군과 의병 그리고 민간인들로 구성된 조선 육군 3,800여 명이 최신식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30,000여 명을 물리친, 이 전투를 제1차 진주성 공방전(第1次 晋州城 攻防戰)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이라 부른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지휘관급 3백 명과 병사 1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오던 왜군의 기세를 한 번 꺾은 것이다. 일본군이 30,000명이 아니라 20,000명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다,
학자들은 진주대첩의 승리 요인을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군과 민이 합심했다.’ 둘째는 ‘지형의 이점을 잘 이용했다.’ 셋째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적을 혼란케 했다.’ 기각지세(掎角之勢)란 ‘사슴의 뒷발굽과 뿔을 동시에 잡은 것처럼 적의 앞뒤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유능한 지휘관인 진주 목사 김시민만이 펼칠 수 있는 작전이다.
1593년 1월 13일(1592년 12월 11일), 독성산성 전투(禿城山城戰鬪)는 권율이 경기도 수원부 현재의 오산시 독성산성에서 일본군들을 물리친 전투이다.
학자들은 이 전투는 물 전투라고 한다. 권율은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독성산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양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인 제8진 우키타 히데이에는 2만 군사를 뽑아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소수 병력을 타격조로 편성해 야습을 감행함으로써 일본군을 교란했다. 일본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으면, 조선군이 밤에 물길을 텄다. 이러기를 반복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의병을 이끌고 왔다.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이 전투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식수(食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왜군은 지구전(持久戰)을 펼치려 했다. 이때 권율이 꾀를 냈다. 적이 보는 앞에서 말을 씻긴 것이다. 이를 본 왜군은 식수가 있다고 오인하여 퇴각했는데, 말을 씻긴 것은 물이 아니고 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