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5부
우리 민족의 기질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은근과 끈기라고 배웠다. 은근과 끈기를 나는 민들레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민들레는 양지바른 언덕배기나 들판에서 자란다. 그런데 식물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도심에서도 노란 꽃의 민들레를 간혹 본다. 보도블록 사이의 좁디좁은 틈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 사람에게 밟히기 쉬운 환경을 이겨내고 꽃대를 곧추세운 채 노란 꽃을 자랑하는 민들레, 그 민들레의 끈질긴 생명력이 우리 민족의 기질이다. 그 은근과 끈기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를 소개한다.
1592년 9월 24일,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노현(露峴) 고개에 포진하고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 병력 2만여 명이 서쪽으로 진격해 온다.’라는 정보는 입수했다. 노현(露峴) 고개는 일본군이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충지다.
그날 오후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고 선봉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숭인은 ‘함부로 활을 쏘지 말라.’ ‘인기척을 죽이고 기다리라.’ 했다. 왜적도 급히 공격하거나 포위하지 못했다. 오후 4시경 적병 몇 명이 진 앞에 나타나 내부를 살피려고 기웃거렸다. 그때를 기하여 집중 사격했다. 침착한 작전을 펼친 듯하다.
9월 25일 오전 10시경, 유승인은 무모하게 싸우지 않고, 창원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적병 80여 명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민가를 불태웠다. 유숭인은 크게 탄식하며 마산포로 철수했다.
그 결과 창원성을 내주었고, 조선군 1,400여 명이 전사했다. 이런 자가 무슨 지도자인가? 싸울 때는 싸워야 진정한 지도자이다. 백성을 보호하려면 맞서 싸워야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당당하게 싸워야 한다.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요,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유승인은 조선인의 기질 은근과 끈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노현(露峴) 창원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행태는 지극히 실망스럽다. 경상 우수사라는 직책이 무색할 정도로 무능했다.
10월 10일(11월 13일)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 수성(守城)에 성공한 최초의 전투이다. 관군과 의병 그리고 민간인들로 구성된 조선 육군 3,800여 명이 최신식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30,000여 명을 물리친, 이 전투를 제1차 진주성 공방전(第1次 晋州城 攻防戰)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이라 부른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지휘관급 3백 명과 병사 1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오던 왜군의 기세를 한 번 꺾은 것이다. 일본군이 30,000명이 아니라 20,000명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다,
학자들은 진주대첩의 승리 요인을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군과 민이 합심했다.’ 둘째는 ‘지형의 이점을 잘 이용했다.’ 셋째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적을 혼란케 했다.’ ‘기각지세(掎角之勢)’란 ‘사슴의 뒷발굽과 뿔을 동시에 잡은 것처럼 적의 앞뒤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일컫는 말이다.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이야말로 조선인의 기질 은근과 끈기를 분명하게 보여준 유능한 지휘관이다
1592년 12월 11일(1593년 1월 13일), 독성산성 전투(禿城山城戰鬪)는 권율이 일본군들을 물리친 전투이다. 독성산성은 경기도 수원부 현재의 오산시 독성산성이다.
학자들은 이 전투를 물 전투라고 한다. 권율은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독성산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양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인 제8진 우키타 히데이에는 2만 군사를 뽑아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소수 병력을 타격조로 편성해 야습을 감행함으로써 일본군을 교란했다. 일본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으면, 조선군이 밤에 물길을 텄다. 이러기를 반복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의병을 이끌고 왔다.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이 전투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식수(食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왜군은 지구전(持久戰)을 펼치려 했다. 이때 권율이 꾀를 냈다. 적이 보는 앞에서 말을 씻긴 것이다. 이를 본 왜군은 식수가 있다고 오인하여 퇴각했는데, 말을 씻긴 것은 물이 아니고 쌀이었다. 독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권율 역시 조선인의 기질 은근과 끈기를 분명하게 보여준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1592년 9월 16일(10월 20일)부터 1593년 1월 28일(2월 28일)까지의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가 가토 휘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경성 전투, 장평 전투, 임명 전투, 백탑교 전투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관북(關北) 지역의 영토를 회복했다. 북관대첩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정문부도 조선인의 기질 은근과 끈기를 분명하게 보여준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북관대첩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정문부다. 그러나 그는 높은 벼슬을 제수(除授)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순찰사 윤탁연과의 갈등 때문이다. 그 자세한 내막은 생략한다.
진주대첩의 김시민, 독성산성 전투의 권율, 관북대첩의 정문부 등은 민들레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비유되는 조선인의 기질, 은근과 끈기를 유감없이 보여준 우리의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