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朴晉)은 밀양성 전투에서 처음 만났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간 그가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나중에 영천성 전투와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크게 기여했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그의 능력이 일취월장하는 장수였다.
백성들이 흘린 피와 같은 백일홍
그는 1560년(명종 15년) 8월 25일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에서 태어났으며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했다.
1592년(선조 25년) 일본군이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지만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되돌아갔다. 밀양성으로 복귀하여 남은 병력의 수습하고 병사를 모병하는 (음 4월 16일),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 그는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소산을 지키다 패배하고, 성안에서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가까스로 탈출하여 밀양부에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
이때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은 그를 힐난했다.
“박진(朴晉)이 밀양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
맞다. 당시 박진은 형편없었다. 이때 일본군의 기세는 밀려오는 파도였다. 거기에 돌 하나 던져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박진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일본군은 (음 4월 16일)에 동래성을 함락하였고, 17일에는 양산에 무혈입성했다. 무풍지대나 다름없이 낙동강을 따라 북진했다.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좁은 길목을 지켰다. 이때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박진은 이들을 일본군으로 오인했다.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가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
박진을 비롯하여 조선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진의 3백여 군사는 전투도 하지 않고 거의 전멸당했다.
동년 8월 영천성(永川城)이 함락되었다. 그 무렵 정세아, 조희익 등이 안동성을 공격할 목적으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박진은 별장 권응수(權應銖)를 파견했다. 권응수의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말 200 여 필, 총통과 창검 900 여개 등을 노획하고, 포로 1천90여 명을 구출해 내는 전과를 올렸다.
박진은 영천성 전투도 지원했다. 사실 박진은 의병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진두지휘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게 불만이었지만 내색 없이 전투가 시작될 때 별장 권응수를 보내 지원하고, 전투 중에도 군관 변응규를 보내 치사(致辭)하고 군기(軍器)와 화약류 등을 보내 군사들을 격려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려 하지 않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장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였다.
이러한 그에게 사야가라하는 일본인이 귀순해 왔다. 사야가는 선조에게서 김해 김 씨 성을 하사 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 김충선 그가 귀순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하여 본의 아니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 인의의 나라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어 저는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승리의 배경으로 대개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 명나라의 지원, 의병활동 등을 거론한다. <조선통신사>의 공동저자들은 여기에 ‘항왜’를 덧붙인다. 항왜 김충선의 역할이 그만큼 컸다.
박진의 활약은 경주성 전투에서 빛났다. 권응수(權應銖),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등이 선봉으로 나선 제1차 경주 전투에서는 500명의 군사를 잃고 후퇴했다. 한 달 후 제2차 전투에서는 이장손이 발명한 신예 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했다. 그 무기는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로써 일본군을 상주나 서생포 방면으로 몰아내고, 영남 지역의 중심부를 지켰다.
1592년전쟁 초기 도망 다니기 바빴던 박진,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형편을 알고 거기에 맞게 대처하는 현명함,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근성 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그해 9월, 선조는 박진에게 양가죽 옷을 하사하고, 종2품 벼슬인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