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포기를 모르는 장수, 박진

수필. 임진왜란 제5부

by 수필가 고병균

박진(朴晉)은 밀양성 전투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실망스러운 지도자였다. 영천성 전투와 경주성 전투에서 만났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일취월장(日就月將)한 장수였고, 포기를 모르는 장수였다.


그는 1560년(명종 15년) 8월 25일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에서 태어났으며 24세인 1583년(선조 16년),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했다.


1592년(선조 25년) 일본군이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박진도 퇴각했지만 소산역에서 밀양성으로 되돌아왔다. 거기서 남은 병력을 수습하고 병사를 모병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4월 16일,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 그는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가까스로 탈출하여 밀양부에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


“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퇴각하여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는 핑계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이 박진을 향하여 힐난한 말이다. 이수광(李睟光)은 누구인가? 우리나라의 최초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편찬한 실학파 학자이다. 임진왜란 당시 위기의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말은 없다. 비난을 받을 만큼 형편없었던 박진은 일본을 상대하려고 도전했다. 그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일본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다. 4월 16일에 동래성을 함락하였고, 17일에는 양산에 무혈입성했다. 무풍지대나 다름없이 낙동강을 따라 북진했다.

박진은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지다.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좁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경상 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지원군이 오고 있었다. 어리숙한 박진은 일본군으로 오인하고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를 잃었다. 3백여 군사는 전투도 하지 않고 거의 전멸당했다. 당시 박진은 형편없는 지도자였고, 조선군 병사들 역시 기초 훈련도 안 된 오합지졸이었다.

동년 8월 영천성(永川城)이 함락되었다. 그 무렵 정세아, 조희익 등이 안동성을 공격할 목적으로 의병을 모집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진은 적극 지원했다. 별장 권응수(權應銖)를 파견하며 지원했다. 사실 박진은 의병을 자신이 진두지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전투 중에도 군관 변응규를 보내 치사(致辭)하였으며, 군기(軍器)와 화약류 등을 보내 군사들을 격려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려 하지 않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박진은 장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였다.


이런 그에게 ‘사야가’라고 하는 일본인이 귀순해 왔다. 사야가는 선조에게서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 김충선 그가 귀순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하여 본의 아니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 인의의 나라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어 저는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 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학자들은 임진왜란에서 승리의 배경으로 대개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 명나라의 지원, 의병 활동 등을 거론한다. <조선통신사>의 공동 저자들은 여기에 ‘항왜 김충선’을 추가했다. 임진왜란 중 항왜 김충선의 역할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경주성 전투는 1592년 4월부터 1593년 8월 사이에 벌어진 네 번의 전투이다. 2차 3차 전투에서 박진은 포기를 모르는 장수로 각인되었다.

1차 전투는 4월에 벌어졌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만여 왜군이 경주를 공격했다. 이 무렵 경주 부윤의 교체가 있었는데, 전임 윤인함(尹仁涵)은 후임 변응성(邊應星)이 도착하기 전에 도주했다. 판관 박의장(朴毅長)과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이 성을 지키려 했으나 박의장도 버티지 못하고 도주하였다.

2차 전투는 그 해 8월에 벌어졌다. 박진(朴晉)은 경주성 탈환할 목적으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병력을 권응수의 휘하에 합세시켰다. 그리고 권응수 · 박의장을 선봉으로 삼아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언양에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아 패주하였다.

3차 전투는 9월에 벌어졌다. 2차 전투에서 패한 박진이 돌아와서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결사대 1천 명을 모집했다. 이 전투에서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등장한다. 왜적은 비격진천뢰의 공격을 받아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울산 서생포(西生浦) 방면으로 퇴각했다. 포기를 모르는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했다.

4차 전투는 1593년(선조 26) 8월 6일에 벌어졌는데, 생략한다.


33세인 1593년(선조 26년) 2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진은 일본군 수급 1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 4월 12일 가의대부(종2품)가 되었다.

박진은 지휘관으로 다소 미흡했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는 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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