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외로운 장수, 박진의 수난

수필. 임진왜란 제5부

by 수필가 고병균

1593년이 되었다. 그해 2월, 박진은 일본군 수급 111개를 의주 행재소로 보냈다.

수급 111개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당시 성인의 몸무게를 50Kg으로 머리 무게를 4Kg으로 계산하면 수급 전량의 무게는 444Kg이나 된다.

어떻게 운반했을까? 소달구지를 이용하면 좋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형편없다. 평지만 있는 게 아니라 산을 넘고 강도 건너야 한다. 그런 까닭에 지게로 날랐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포장했을까? 가마니에 넣어 포장했을 것이다. 10개씩 넣으면 40Kg, 20개씩 넣으면 80Kg이다. 그러니 가마니 하나에 10개씩 포장했을 것이다.

의주 행재소까지의 그 거리는 얼마나 될까? 광주에서 의주까지 직선거리는 약 530Km이다. 경주에서 의주까지의 거리도 그 정도 된다.

운반하는 데 걸린 날짜는 얼마나 될까? 보통 사람이 하루에 걷는 거리는 백리(40Km)를 간다. 따라서 하루 평균 40Km씩 걷는다고 계산하면, 530Km의 거리를 가는데 최소 12일이 소요된다.

이게 소나 돼지의 머리가 아니고 사람의 머리다. 이것을 생각하면,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소름이 끼친다. 정말 끔찍하다.

그해 4월, 박진은 별장(別將)에 임명되었는데, 습증(濕證)으로 활을 당길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위엄과 명성은 아군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피난 중인 선조가 박진을 불러 부원수로 임명하고 여러 장수를 독전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반대다. 각 도와 읍에서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는 점과 영남 지역을 회복한 공 그리고 그 지역의 민심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등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들의 진정한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이랬던 박진에게 수난이 닥쳤다.

1593년(선조 26년)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이 박진 등 조선의 장군 네 명을 묶어다가 곤장을 쳤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모른다.

다음 해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는데, 박진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군사훈련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1597년(선조 30년) 3월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이 병든 박진을 또 구타했다. 구타당한 직후 박진은 사직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신들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구타당한 박진에 대하여 위로는커녕 비난하는 중앙의 고급 관리들 참으로 얄밉다.

박진의 시신을 본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은 경연장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명나라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다.’

‘그의 노모를 구휼해야 한다.’

박진이 죽은 해는 1593년인데, 보고한 시기는 1597년 5월이다. 그게 참 이상하다.

가슴뼈는 흉골 또는 '복사뼈'라고 한다. 갈비뼈와 함께 심장과 허파를 보호하는 뼈로 머리뼈만큼이나 단단하다. 그런 뼈가 부려졌다. 나도 갈비뼈를 다친 경험이 있다.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채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왼쪽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그때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심호흡도 할 수 없었다. 재채기라도 나오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박진의 아픔이 나에게 전해온다. 몸서리가 쳐지고,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이나 누승선(婁承先) 이들에게 조선의 장수를 구타할 권한이 있는가? 그 권한을 누가 부여했는가? 선조는 박진의 구타 사건에 대하여 어떤 조치도 취한 바 없다. 박진의 노모에게 구휼(救恤)했다는 말도 없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의 여러 고을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이었다. 그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군졸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을 독려하여, 죽기를 작정하고 항전했다. 박진은 외롭게 싸웠다.

박진은 전투 중에 색깔이 있는 말을 탔다.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을 발라 색깔을 없앴는데, 여러 번 승전하여 그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알려진 후로는 말의 색깔을 그대로 드러냈다.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 대적을 막으려 한 의로운 장수였다.’

‘박진의 충성과 의기가 당시의 여느 장수에 비해 탁월했다.’

‘그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났다.’

박진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1592년 박진은 의로운 장수였다. 노도처럼 밀려오는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저들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어도 그는 의(義)로운 장수였다.

1593년 박진은 비운의 장수였다. 명나라 장수에게 불려가 두 번이나 구타를 당해 가슴뼈가 부러졌다. 그 고통을 선조는 인정하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박진은 아프다는 말도 할 수 없었고, 관직에서 물러나려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이 모든 수난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박진은 향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외로운 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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