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해가 바뀌어 1593년이 되었다. 그해 2월, 박진은 일본군 수급 111개를 의주 행재소로 보냈다.
수급 111개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몸무게 70Kg인 성인의 머리 무게는 4~5Kg이라고 한다. 당시 성인의 몸무게를 50Kg, 머리 무게를 4Kg으로 계산하면 수급 전량의 무게는 444Kg이나 된다.
이것을 어떻게 포장했을까? 가마니에 넣어 포장했을 것이다. 10개씩 넣으면 40Kg, 20개씩 넣으면 80Kg이다.
의주 행재소까지 거리는 얼마나 될까? 광주에서 의주까지 직선거리는 약 530Km이다. 경주에서 의주까지의 거리도 그 정도 된다.
이것을 어떻게 운반할까? 소 달구지를 이용하면 좋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형편없다. 평지만 있는 게 아니라 산을 넘고 강도 건너야 한다. 그런 까닭에 지게로 날랐을 것이다. 그러려면 수급을 10개씩 포장했을 것이다.
운반하는 데 걸린 날짜는 얼마나 될까? 보통 사람의 걷는 속도로는 하루에 백리를 간다. 짐을 진 사람이니 하루 평균 30Km씩 걷는다고 계산하면 18일이 소요된다.
이게 소나 돼지의 머리가 아니고 사람의 머리다. 이것을 생각하면 전쟁은 정말 끔찍하고 무섭다.
그해 4월 박진은 별장(別將)에 임명되었는데, 습증(濕證)으로 활을 당길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위엄과 명성은 아군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피난 중인 선조가 박진을 불러 부원수로 임명하고 여러 장수를 독전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반대다. 각 도와 읍에서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는 점과 영남 지역을 회복한 공 그리고 그 지역의 민심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등 그럴듯한 이유를 들었다. 그들의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이랬던 박진에게 수난이 닥쳤다.
1593년(선조 26년)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이 박진 등 조선의 장군 네 명을 묶어다가 곤장을 쳤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모른다.
다음 해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는데, 박진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군사훈련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1597년(선조 30년) 3월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이 병든 박진을 또 구타했다. 구타당한 직후 사직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신들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박진은 아프다는 말도 못 했다. 중앙의 고급 관리들, 참으로 못된 자들이다.
향년 38세로 세상을 하직한 박진, 그의 시신을 본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은 1597년 5월, 경연장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명나라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다.’
‘그의 노모를 구휼해야 한다.’
가슴뼈는 흉골 또는 복상뼈라고 한다. 갈비뼈와 함께 심장과 허파를 보호하는 뼈로 머리뼈만큼이나 단단하다. 그런 뼈가 부려졌다. 나도 갈비뼈를 다친 경험이 있다.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채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왼쪽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그때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심호흡도 할 수 없었다. 재채기라도 나오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박진의 아픔이 나에게 전해온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고,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이나 누승선(婁承先) 이들에게 조선의 장수를 구타할 권한을 부여했는가? 선조는 이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한 바 없다. 박진의 노모에게 금품을 주며 구휼(救恤)했다는 말도 없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의 여러 고을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이었다. 그 상황에서 박진은 외롭게 싸웠다. 어찌할 바 모르는 군졸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을 독려하여, 죽기를 작정하고 항전했다.
박진은 전투 중에 색깔이 있는 말을 탔다.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을 발라 색깔을 없앴는데, 여러 번 승전하여 그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알려진 후로는 말의 색깔을 그대로 드러냈다.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 대적을 막으려 한 의로운 장수였다.’
‘박진의 충성과 의기가 당시의 여느 장수에 비해 탁월했다.’
‘그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났다.’
박진에 대하여 학자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박진은 저들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어도 노도처럼 밀려오는 적군에 맞선 의로운 장수였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에게 불려 가 구타를 당했을 때도, 가슴뼈가 부러진 고통 중에도 그를 변호하거나 위로해 준 자는 없었다. 선조는 물론 대신들조차도 나 몰라라 했던 외로운 장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