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벽제관 전투(碧蹄館戰鬪)는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벽제관에서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벽제관은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이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했다.
이여송(李如松)의 명군과 김명원(金命元)의 조선군은 계사년 음력 1월 6일 ~ 9일 사이에 일어난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6개월 동안 평양성에서 머물렀던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몰아내고 평양성을 탈환했다.
명의 제독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음 1월 10일) 개성도 탈환했다. (음 1월 25일) 수색대로 보냈던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부대가 가토 미츠야스, 마에노 나가야스 일본군과 소규모 접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적의 수급 60명을 베면서 명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여송은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조선의 영의정 류성룡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가 얼마나 교만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군이 지금 앞으로 진격하려 하는데, 듣건대 앞길에 군량과 마초가 없다고 하니 의정(류성룡)은 대신으로서 마땅히 나랏일을 생각해야 될 것이므로 수고를 꺼리지 말라고 급히 가서 군량을 준비하여 소홀해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은 보급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명군은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고 자국 화폐인 은전으로 값을 지불하려 했다. 당시 명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은을 화폐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화폐 경제가 자리잡지 못해 은전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할 길이 막혀버렸다. 조선 조정이 성심성의껏 준비해 주었지만, 전쟁터가 된 국가에서 나오는 것이 시원찮아 명군 입장에서는 그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결과 명군은 약탈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최악의 삽질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와중에 명의 만력제는 조선 백성들을 구원한다고 자기 비자금까지 탈탈 털어 대량의 식량을 사다 날라주는 은혜를 베풀어서 ‘고려 천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에서는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를 지어준다. 나중에 조선의 시장에서도 은의 유통이 이루어졌다.
승리에 취한 이여송은 일본군을 얕잡아 보았고, ‘한성을 한 번에 수복하자.’라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음 1월 26일) 파주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는 협상을 통해 얻은 승리였기에 진정한 승전은 아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금방 전열을 정비했다.
(음 1월 26일), 명군은 선봉 3천의 기병을 한성으로 보냈다. 정탐을 통해 명군의 경로를 파악한 일본군은 이튿날 벽제관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음 1월 27일), 이여송은 조명연합군 다수의 병력과 포병 등을 놔두고 기병 1000여 병력과 호위군만 꾸려 한성으로 직접 향했다. 가는 도중 일본군의 급습을 당하였다. 조총 사격에 이어 백병전이 벌어졌다. 협소한 공간에서 명군은 기마병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길바닥이 녹아 진흙탕이 되었다. 악조건으로 인하여 명군 기병대는 후퇴하고 말았다. 여기서 이여송은 포로가 될 뻔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오오타치를 휘두르며 싸웠다. 오오타치는 일본도의 한 종류다. 커다란 타치 혹은 우치가타나 형상의 무기로, 길이가 1m를 조금 넘는 수준에서 3m를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일본군에게 조총이 있었으나, 그것은 장전속도와 명중률에 한계가 있어 육박전에서는 오오타치를 주 무기로 사용했을 것이라 말한다.
벽제관 전투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명사신종실록에서 자군의 승전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의 기록인 태합기에서는 평양, 개성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명군 10만을 적은 병력으로 격파했다고 기록했다. 그 피해 규모도 각기 다르다.
일본 전쟁의 역사 조선 편에서는 ‘명군은 2만 중 5천이 전사하였다.’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5일 자에는 ‘일본군은 120명이 전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19일 자에는 ‘조명과 일본군 모두 500명씩 전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조명연합군이 대패한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피해는 500과 5000의 중간 정도, 일본군 피해는 100~500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 전투로 조명연합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여송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눌러앉게 되었다. 또 일본 측에 휴전을 제안한다. 한편 조명연합군과의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을 알고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권율에게 대패하였고, 일본군은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여송은 무책임했다. 그것을 나무라기에 앞서 먼저 번성해야 한다. 이런 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긴 잘못이 조선의 왕 나에게 있다고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