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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5-6] 웅포 해전(1)

수필 임진왜란

바다에서도 전투는 벌어지고 있다. 1593년 3월 12일(음력 2월 10일)부터 무려 1개월 이상 전개된 웅포 해전이 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옹포에 주둔한 왜 수군을 공격한 해전이자, 상륙작전이다. 그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후 나오는 날짜는 1593년의 음력이다.     


2월 6일 낮 12시, 이순신은 42척의 전선을 인솔하여 출격했다. 7일 남해도의 남단 미조목을 거쳐 사량도에서 일박하고 8일 정오에 견내량에서 전라 좌수영 이억기의 함대 40척, 경상 우수영 원균의 함대 7척 등 총 89척이 되었다. 그런데 원균의 함대가 상대적으로 적다. 적어도 터무니없이 적다. 이상하지 않는가?


연합 함대는 8일 오후, 견내량을 출범하여 칠천도의 외줄포에 당도했으나 일기불순으로 9일과 10일은 유박 하면서 작전 계획을 검토했다. 


일본 수군의 전함은 아타케부네, 한국어로는 안택선(安宅船)이다.  배는 대략 3층 높이, 길이는 30m, 두 사람의 노잡이를 둔 대형 노 40자루를 장치하고 있다. 승선 인원은 노잡이 50명에서 200명, 전투원도 수 백 명이나 되는 큰 배다.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약간 작은 것 때문에 해전에서 번번이 졌다.                    


  이순신은 1592년에 13번의 해전을 통해 일본 수군 함대 383척을 격침시키거나 나포했다. 왼쪽 아래 표에서 보듯 부산포 해전에서 무려 128척이 격침당했는데 일본은 수군을 빠르게 재무장하여 조선의 웅포에 115척을, 부산포에 500여 척을 주둔시켰다.     


조선 수군은 어떠했을까? 칠천량 해전에 투입된 조선 수군의 판옥선 100여 척이 모두 격파당했다. 이 소식은 전해 들은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7월 18일 맑음

새벽 나절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모래 전에 수군이 피습되어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이 전사하고 수군이 궤멸했다.’ 하였다. 통곡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후 2달이 지난 9월 16일, 명량 해전에 투입된 조선 수군의 함선은 불과 13척, 그동안 보충된 배는 단 1척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본의 조선(造船) 산업이 조선의 그것에 비해 크게 앞서 있음을 말해준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조선 산업도 발전시키고 비격진천뢰와 같은 무기산업도 발전시켜야 한다. 식량을 보급하는 농업은 물론 전자 산업도 발전시켜야 한다. 모든 국민이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순신과 같은 지도자와 함께 자신의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건강한 국민을 길러내야 한다. 이것이 전쟁을 예방하는 첩경이다.      

이순신은 부산포를 공격하지 않고 웅포 연안을 공격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조선 수군의 함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는 총 89척으로 웅포에 주둔한 일본의 함대 115척을 상대해야 한다. 그것만 해도 벅차다. 그런데 부산포에 주둔한 함선은 500척이 넘는다. 부산포 앞바다는 웅포 앞바다에 비해 훨씬 넓다. 그들을 상대하기에 불리하다. 웅포는 부산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들을 제거한 후에야 부산포 출격이 가능하다. 섣불리 부산포를 공격했다가는 양면에서 협공당할 위험이 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 작전을 펼치기에 부산포보다는 웅포가 더 유리하다. 그래서 웅포를 선택했다.      


웅포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웅천 읍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수로의 폭이 600m지만 배가 지나갈 수 있는 폭은 불과 200m로 좁은데 그 거리는 1.5km나 된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목책을 설치했었고, 수로의 양쪽 곧 웅천 왜성(남산 왜성)과 지금의 남문 전망대가 있는 백석말에 조총 부대를 배치했다. 판옥선이 다가가면 좌우 양쪽에서 엄호 사격을 했다.      


이순신은 적을 저도 앞바다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속지 않으려는 듯 나오지 않고, 방어만 했다. 부득이 작전을 변경했다.


이순신은 주력 부대를 웅포 앞바다의 작은 섬 송도 서쪽 해안에 대기시키고, 수심이 깊은 밀물 때를 이용하여 공격했다. 7∼8척씩 교대로 진입하여 유격전을 펼쳤다. 2월 10일, 12일, 18일, 20일, 22일, 28일 그리고 3월 4∼6일 등 7회의 공격을 감행했다.      


이것은 이순신의 멋진 작전이었다. 여기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꼼짝 못 하게 묶어 놓은 작전이다. 한 달이 넘는 기간 꽁꽁 묶어 놓았다. 그 결과 행주산성을 공격하는 일본군을 지원할 수 없었다. 권율을 간접적으로 도운 것이다. 그 결과 권율은 일본군을 물리치고 행주산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멋진 작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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