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5부
바다에서도 전투는 벌어지고 있었다. 1593년 2월 10일(3월 12일)부터 무려 1개월 이상 전개된 웅포 해전이 그것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옹포에 주둔한 왜 수군을 공격한 해전이자, 상륙작전이다. 그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후 나오는 날짜는 1593년의 음력이다.
2월 6일 낮 12시, 이순신은 42척의 전선을 인솔하여 출격했다. 7일 남해도의 남단 미조목을 거쳐 사량도에서 일박했다. 8일 정오에 견내량에서 전라 좌수영 이억기의 함대 40척이 합세하고, 경상 우수영 원균의 함대 7척이 합세했다. 그런데 원균의 함대가 터무니없이 적다. 어떤 학자는, ‘원균이 경상 우수영 병력을 온존시켰다면, 완편 함대 기준 170척가량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그날 오후, 연합 함대는 견내량을 출범하여 칠천도의 외줄포에 당도했다.
9일과 10일은 일기불순으로 유박하면서 작전 계획을 검토했다.
일본 수군의 전함은 아타케부네, 한국어로는 안택선(安宅船)이다. 배는 3층 높이, 길이는 30m, 두 사람의 노잡이를 둔 대형 노 40자루를 장치하고 있다. 승선 인원은 노잡이 50명에서 200명, 전투원도 수백 명이나 되는 큰 배다. 그러나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약간 작다. 그것 때문에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번번이 졌다.
이순신이 1592년에 13번의 해전을 통해 격침시키거나 나포한 일본 수군 함대가 무려 383척이나 된다.
또 부산포 해전에서 무려 128척이 격침당했다. 그런데 빠르게 재무장하여 조선의 웅포에 115척을, 부산포에도 500여 척을 주둔시켰다.
한편 조선 수군은 어떠했을까? 앞에서 보듯 웅천 해전에 투입된 조선 수군 함선은 불과 89척이다. 조선 수군의 전체 함대가 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본의 조선(造船) 산업이 조선의 그것에 비해 크게 앞서 있음을 말해준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함선을 만들어 내는 조선 산업을 발전시키고, 비격진천뢰를 생산하는 무기 산업도 발전시켜야 한다. 식량을 보급하는 농업은 물론 오늘날의 전자 산업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결국 국민 몫이다. 국민은 각자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순신과 같은 지도자와 함께 자신의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전쟁을 이겨내는 비결이요, 전쟁을 예방하는 첩경이다.
이순신은 너른 부산포를 공격하지 않고 좁은 웅포 연안을 공격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조선 수군의 함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는 웅포에 주둔한 일본군 함대 115척을 상대하는 것도 벅차다. 그런데 부산포에 주둔한 함선은 500척이 넘는다. 부산포 앞바다는 웅포 앞바다에 비해 훨씬 넓다. 그들을 상대하기에 불리하다. 웅포의 위치는 부산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들을 제거한 후에야 부산포 출격이 가능하다. 섣불리 부산포를 공격했다가는 앞뒤에서 협공당할 위험이 있다.
작전을 펼치기에 부산포보다는 웅포가 더 유리하다. 그래서 웅포를 선택했다.
웅포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웅포 읍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수로의 폭은 600m였지만 배가 지나갈 수 있는 강폭은 불과 200m로 좁다. 그런데 거리는 1.5km나 된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강 연안에 목책을 설치하고, 수로의 양쪽에 조총 부대를 배치했다. 웅포 왜성(남산 왜성)에 배치하고 지금의 남문 전망대가 있는 백석말에도 배치했다. 판옥선이 다가가면 좌우 양쪽에서 엄호 사격을 했다.
이순신은 적을 저도 앞바다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나오지 않고, 방어만 했다. 부득이 작전을 변경했다.
이순신은 주력 부대를 웅포 앞바다의 작은 섬 송도 서쪽 해안에 대기시키고, 수심이 깊은 밀물 때를 이용하여 공격했다. 7∼8척씩 교대로 진입하여 유격전을 펼쳤다. 2월 10일, 12일, 18일, 20일, 22일, 28일 그리고 3월 4∼6일 등 7회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다. 이 기간 왜 함선을 분멸했다. 2월 18일에 웅포에서 5척, 3월 4일 저도에서 8척, 3월 5일에 또 저도에서 17척, 3월 6일 청송에서 21척 등 4회에 걸쳐 51척을 분멸했다. 저도는 거제도를 말한다.
국내 사료에는 웅포 해전의 전과를 일자별 기록하지 않고 단순히 20여 척으로 되어 있다. 반면 일본 사료에는 일자별로 피해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사료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습관도 갖추어야 한다.
웅포 해전의 마지막 날인 2월 22일 이순신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그 내용은 다음에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