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5부
웅포 일대에는 적 육군 16,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포 해전 이후 함께 있던 1,600명의 승군과 의병을 상륙작전에 투입했다. 남양리(웅포 동쪽)에 1,100명을 배치하고, 제포(웅포 서측)에 600명을 배치했다 그들로 하여금 상륙하여 적의 접근 예상 통로를 차단하고 방어하게 했다. 이번 웅포 해전은 적을 섬멸하기 위한 상륙작전이다.
웅포 주위에 웅포 왜성, 웅포 읍성, 제포성 등의 왜성이 많아서 일본군이 수비에 대한 부담이 적다. 또 웅포에 도요지가 있어서 도공을 데려가기에도 좋다. 이런 까닭에 일본군은 웅포를 사수해야 한다. 더는 물러설 수 없다.
일본군은 성을 점령하면 먼저 성을 쌓았다. 그 성을 왜성이라 말한다. 불과 1년 사이에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성을 쌓았다. 장기간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성 쌓기를 일본군은 교과서처럼 실천했다. 일본군이 쌓은 성에 대하여 따로 이야기한다.
이순신은 수륙병진을 계획하고 조정에 건의했다. 이때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말라’(片帆不退)는 선조의 지시가 내려왔다. 이순신에게 힘을 실어주는 명령이다.
1593년 2월 22일(3월 23일),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함대에서는 화포를 발사하였고, 상륙한 의병과 승병들은 다수의 적을 무찔렀다.
“…… 승병들은 창을 비끼고 혹은 활과 총통으로 종일 돌격전을 감행하여 무수한 적을 쏘아 죽였다. 비록 참두(斬頭)는 못했다 해도 우리 군사는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당시 상륙군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참두는 못했어도 우리 군사는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 말에 주목한다. 이순신이 생각하는 전투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의 대장을 참두하는 것이다. 만약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욕심을 부렸다면 우리 수군도 많은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하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조선의 연합 함대는 칠천도의 외줄포로 물러서서 부대를 재정비했다.
2월 28일, 주력을 이곳에 두고 일부 부대를 이끌고 갔다. 3월 6일에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약속한 지켜지지 않았다. 조명연합 육군은 오지 않은 것이다.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말라’(片帆不退)는 선조의 지시는 허공에 흩어지는 바람 소리였다.
3월 10일 통제영으로 돌아갔다. 1개월이 넘는 장기 원정이라 장병들의 쌓인 피로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벽에 부딪힌 군수 지원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음력 3월이면 농사철이다. 파종 시기에 맞춰 수군들도 농사일을 거들어야 한다.
웅포 해전이 임진왜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나다.
웅포 해전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한 간접 요인이 되었다. 전라도를 지켰기에 권율이 전라도에서 3천 의병을 동원할 수 있었고, 남해의 제해권을 지켰기에 충청 수사 정걸이 판옥선에다 화살과 쌀을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웅포 해전은 일본군의 서울 철수를 강요했다. 2월 27일 서울에 모인 일본 장수 15명은 다음의 결정을 내렸다.
‘식량이 부족하므로 부산으로 철수한다.’
‘부산에 가서 도요토미에게 건의하여 본국 철수 여부를 결정한다.’
웅포 해전은 일본이 강화 회담에서 조선에 불리한 조건을 제시하지 못하게 압박했다.
‘일본군은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되, 명군과 조선군이 도중에 공격 못 하도록 보장한다. 일본군도 도중에 약탈과 살인을 하지 않는다.’
‘일본군은 서울 철수와 동시에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일본군은 4월 18일 서울을 떠난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회담이었지만, 이런 정도로 성사된 것은 전적으로 웅포 해전의 결과이다. 이순신이 일본군에게 가한 압박의 산물이다.
그런데 웅포 해전에 대하여 패전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저술가가 있다.
백지원은 그의 저서 ‘조일전쟁’에서 웅포 해전을 패전이라고 소개한다. 조선 수군의 전선이 암초에 걸려 병사들이 육지로 도망친 것을 300명 참사라고 했다.
다른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육군의 도움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수군의 잘못이 아니고, 웅포를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총 51척의 적선을 분멸했으며, 적의 육군 2,500명을 사살했으니 패전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순신의 업적을 폄훼한 백지원, 그를 향하여 패배주의자라고 하면 잘못일까?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에게 나라를 사랑하고 보존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웅포 해전이 패전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이순신은 조선의 구겨진 체면을 세웠다. 웅포 해전은 강화회담에서 일본이 억지를 부리지 못하도록 강한 압박을 가한 전투였다. 회담에서 조선이 제외되었음에도 그런 효과가 나타났다. 이것을 나는 ‘이순신 효과’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