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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5-7] 웅천 해전(2)

수필 임진왜란

웅천 해전은 한 달이 넘게 진행된 장기전이었다. 웅포는 수로가 좁고 길다. 거기에 일본 육군 1만 6천여 명의 대병력이 포진하고 있다. 이순신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부산포 해전 이후 함께 있던 승군과 의병을 상륙작전에 투입했다. 남양리(웅포 동쪽)에 1,100명을 배치하고, 제포(웅포 서측)에 600명을 배치했다 그들로 하여금 상륙하여 적의 접근 예상 통로를 차단하고 방어하게 했다. 웅포의 적을 섬멸하기 위한 상륙작전이다. 웅포 해전이라고도 말한다. 


일본군 입장에서 웅포는 수비하기에 아주 좋은 요새다. 웅포 주위에 웅천 왜성, 웅천 읍성, 제포성 등의 왜성이 많아서 수비에 대한 부담이 적다. 웅천 도요지가 있어서 도공을 데려가기에도 좋다. 이런 까닭에 일본군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이다. 


일본군은 성을 함락하면 먼저 성을 쌓았다. 그 성을 왜성이라 말한다. 불과 1년 사이에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성을 쌓았다. 장기간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성 쌓기를 일본군은 교과서처럼 실천했다. 이점 우리와 다르다.      


1593년 3월 23일(음 2월 22일),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함대에서는 화포를 발사하였고, 상륙한 의병과 승병들은 다수의 적을 무찔렀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의 내용이 당시 상륙군의 역할과 활약상을 잘 알려준다. 


“…… 승병들은 창을 비끼고 혹은 활과 총통으로 종일 돌격전을 감행하여 무수한 적을 쏘아 죽였다. 비록 참두는 못했다 해도 우리 군사는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     

승병은 창을 비껴 들고 싸웠다. 활이나 함포를 들고도 싸웠다. 

“우리 군사는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 말에 주목한다. 이순신이 생각하는 전투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의 대장을 참두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이루려고 욕심을 부렸다면 우리 수군도 많은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하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진하게 느껴진다.     


조선의 연합 함대는 칠천도의 외줄포로 물러서서 부대를 재정비했다.  

2월 28일, 주력을 이곳에 두고 일부 부대를 이끌고 가서 공격했다. 3월 6일에도 공격을 감행했다.      


이순신은 수륙병진을 계획하고 조정에 건의했다. 이때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말라’(片帆不退)는 선조의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선조의 강한 의지와는 달리 약속한 조·명 연합군 육군은 오지 않았다. 그 지시는 허공에 흩어지는 바람 소리였다.


이순신은 3월 10일 통제영으로 돌아갔다. 1개월이 넘는 장기 원정이라 장병들의 쌓인 피로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군수 지원 문제도 벽에 부딪혔다. 또 음력 3월이면 농사철이다. 파종 시기에 맞춰 수군들도 농사일을 거들어야 한다.      

웅천 해전이 임진왜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나다. 


웅포 해전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한 간접 요인이 되었다. 전라도를 지켰기에 권율이 전라도에서 3천 명 의병을 동원할 수 있었고, 남해의 제해권을 지켰기에 충청 수사 정걸이 판옥선에다 화살과 쌀을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웅천 해전은 일본군의 서울 철수를 강요했다. 2월 27일 서울에 모인 일본 장수 15명은 ‘식량이 부족하므로 부산까지 철수한다.’ 그리고 ‘부산에 가서 도요토미에게 건의하여 본국 철수 여부를 결정한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게 불리한 조건을 주장하지 못하고 강화를 급속하게 진행했다. ‘일본군은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되, 명군과 조선군이 도중에 공격 못 하도록 보장한다. 일본군도 도중에 약탈과 살인을 하지 않는다.’ ‘일본군은 서울 철수와 동시에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일본군은 4월 18일 서울을 떠난다. 


강화 회담이 이 정도로 성사된 것은 전적으로 웅천 해전의 결과이다. 일본군에게 가한 압박의 산물이다.     

그러데 백지원의 저서 ‘조일전쟁’에서 웅포 해전을 패전이라고 소개한다. 조선 수군의 전선이 암초에 걸려 병사들이 육지로 도망친 것을 300명 참사라고 했으니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육군의 도움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수군의 잘못이 아니고, 웅포를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조선 수군은 2월 18일 웅포에서 적선 5척을 격침시켰고, 3월 4일에는 저도(거제도)에서 8척을, 5일에도 저도(거제도)에서 17척을, 6일에는 청승에서 21척을 격침시키는 등 총 51척의 적선을 분멸했으며, 적의 육군 2,500명을 사살했으니 패전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패전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이순신은 웅천 해전에서 조선의 구겨진 체면을 세웠다. 강화 회담에서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일본군에게 강한 압박을 가했다. 


이런 이순신의 업적을 폄훼한 백지원,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에게 나라를 사랑하고 보존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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