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5부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이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상 전투의 3대첩이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의 4대첩으로 불린다. 그 유명한 행주대첩에 관해 알아 본다.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3월 14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일대에서 권율의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하루 종일 벌어진 전투이다.
행주산성은 백제 시대 축성된 성으로 내성인 석성과 외성인 토성이 있다. 권율은 토성 밖으로 목책을 2중으로 두르고 변이중의 화차를 배치했다. 그 화차에는 40개의 신기전이 부착되어 있다. 신기전(神機箭)은 조선 세종대 개발된 고체로켓이다. 로켓 추진식 화살 병기(화전), 또는 그 단위와 체제를 말한다. 고려시대의 화약 로켓 주화를 개량한 무기로, 문종의 화차보급으로 일종의 다연장 로켓 야전포로서 발전했다
반면 일본군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3만의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눠 차례로 공격해 왔다.
일본군 1군과 2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 수뇌부는 상황 판단이 늦었다. 게릴라전이나 축차 투입은커녕 변변한 공성 장비도 없이 물량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반대로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등을 쏘고, 돌 파편을 던지며 방어전을 펼쳤다. 그 결과 일본 1군은 궤멸하고, 2군도 물러났다.
일본군 3군의 지휘관 구로다 나가마사는 누각을 짓고 총병과 궁병을 올려 총포와 활을 쏘아가며 공격하는 전통적인 공성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조선 육군에게는 천자총통이 있었다. 그 포격으로 누각을 파괴했다. 구로다는 조선 육군이 가진 최신식 무기를 간과한 것이다.
일본군 4군 우키타 히데이는 총대장답게 직접 진격해 왔다. 이 공세에 바깥쪽 목책이 뚫리면서 조선군은 내책까지 후퇴했다. 자칫 방어선이 붕괴될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때 권율은 ‘모든 화력을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가 있는 중군에 집중시카러.’고 명령했다. 그것은 매우 현명한 작전이었다. 당시 조선군에게는 변이중의 화차를 40량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 화차는 승자총통 다수를 신기전 틀에 고정시킨 무기다. 비격진천뢰와 박격포인 완구도 있었다. 이들 무가는 우키타 부대의 화려한 장식을 표적 삼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 결과 총사령관 우키타와 2군 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가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 4진도 물러났다
일본군 5군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는 화공 전술을 사용해 내책에 불을 지르려 했다. 그렇지만 조선군은 미리 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5군의 화공은 간단히 끝나고 말았다. 조선군은 방어에만 그치지 않고 반격을 가하였다.
일본군 6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고바야카(小早川秀包)와 히데카네(毛利秀包), 그들은 산성의 서쪽, 비교적 완만한 비탈면을 올라와 공격하였다. 하지만 성벽을 지키고 있던 승병들이 석회 혹은 재 주머니를 뿌린 바람에 일본군들은 눈도 뜨지 못했고, 호흡곤란을 겪으며 무력화되었다.
일본군 7군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은 노장이다. 그는 알았다. 아침부터의 싸움에 나선 조선군이 지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공격해왔다. 승병들이 지키던 서북쪽을 뚫고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백병전을 벌어졌다.
인해전술이라 할만한 물량으로 조선군을 몰아붙였다. 백병전은 일본군의 장기다. 그렇지만 승장 처영과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필사적으로 싸운 터라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권율이 비상한 작전을 구사했다. 구리 가마솥을 머리에 쓰고 지휘한 것이다. 그러다가 지친 병사가 발견되면 솥의 물을 따라 주었다. 이런 지휘관 아래서 못난 병사는 없다. 조선군은 화살이 소모되자 투석으로 맞섰다. 민간인들도 나섰다. 특히 부녀자들은 앞치마에 돌을 나르며 도왔다.
지휘관 권율이 과로로 잠깐 쓰러졌다. 그때 외모가 비슷했던 형 권순이 지휘하여 그 위기를 모면했다. 군관민 2,800명이 한마음 되어 싸웠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패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 같은 구원이 도착했다. 충청 수사 정걸이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게다가 양천으로 가는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이 배를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이라 오해한 일본군이 당황하여 물러갔다. 조선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1백여 명 이상을 참살했다.
어둠이 내리는 유시(저녁 5시~7시) 경에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조선군의 10배가 넘는 일본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그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 후 권율은 주위에 널려 있는 일본군의 시체들을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한 것이다.
조선군 2,800대 일본군 30,000의 맞붙은 행주대첩에서 조선이 승리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변이중의 화차와 이장손의 비격진천뢰 등 최신식 무기가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행주대첩에서 사용한 화차와 비격진천뢰는 당시 문인들이 숭상했던 성리학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이 비하했던 잡학의 산물이다. 따라서 잡학도 발전시켜야 한다. 무기를 생산하는 잡학,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생산하는 다양한 잡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아울러 변이중이나 이장손처럼 잡학에 능한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나라가 건강한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