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5-9] 권율의 행주대첩

수필 임진왜란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이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상 전투의 3대첩이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의 4대첩으로 불리는 유명한 전투이다.

그 유명한 행주대첩에 관해 알아본다.     


행주대첩은 1593년 3월 14일(음력 2월 12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일대에서 권율의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하루 종일 벌어진 전투이다. 

행주산성은 백제 시대 축성된 성으로 내성인 석성과 외성인 토성이 있다. 권율은 토성 밖으로 목책을 2중으로 두르고 변이중의 화차를 배치했다. 

반면 일본군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3만의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눠 차례로 공격해 왔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며 방어전을 펼쳤다. 다행히도 일본군 수뇌부의 상황 판단이 늦었다. 게릴라전이나 축차 투입은커녕 변변한 공성 장비도 없이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일본 1군은 궤멸하고, 2군도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는 누각을 짓고 총병과 궁병을 올려 총포와 활을 쏘아가며 공격하는 전통적인 공성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조선 육군에게는 천자총통이 있었다. 그것을 이용한 포격으로 누각을 손쉽게 파괴했다. 구로다가 조선 육군이 가진 최신식 무기를 간과한 것이다. 


일본군의 총대장이었던 4군의 우키타 히데이에가 직접 진격해 왔다. 이 공세에 바깥쪽 목책이 뚫리면서 조선군은 내책까지 후퇴했다. 자칫 방어선이 붕괴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때 권율은 침착한 전술을 구사했다. 모든 화력을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가 있는 중군에 집중시킨 것이다. 당시 행주성 주둔 조선군에게는 승자총통 다수를 신기전 틀에 고정시킨 변이중의 화차를 40량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비격진천뢰와 박격포인 완구도 있었다. 우키타 부대의 화려한 장식을 표적 삼아 포탄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 결과 총사령관 우키타와 2군 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가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 4진도 물러났다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지휘하는 5군은 화공 전술을 사용해 내책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그렇지만 조선군은 미리 물을 준비해 두었다. 5군의 화공은 간단히 파해되었다. 조선군은 방어에만 그치지 않고 반격을 가하였다. 


일본군 6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 그들은 산성의 서쪽, 비교적 완만한 비탈면을 올라와 공격하였다. 하지만 성벽을 지키고 있던 승병들이 석회 혹은 재 주머니를 터뜨려서 뿌린 바람에 일본군들은 일시적으로 눈을 뜨지 못했고, 호흡곤란을 겪으며 무력화되었다. 


아침부터의 싸움에 나선 조선군이 지치기 시작한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일본군 노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7군이 들어왔다. 승병들이 지키던 서북쪽을 뚫고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백병전을 벌어졌다. 일본군은 가히 인해전술이라 할만한 물량으로 조선군을 몰아붙였다. 백병전은 일본군의 장기다. 그렇지만 승장 처영과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필사적으로 싸운 터라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권율이 비상한 작전을 구사했다. 구리 가마솥을 머리에 쓰고 지휘한 것이다. 그러다가 지친 병사가 발견되면 솥의 물을 따라 주었다. 이런 지휘관 아래서 못난 병사는 없다. 조선군은 화살이 소모되자 투석으로 맞섰다. 민간인들도 나섰다. 특히 부녀자들도 앞치마에 돌을 나르며 도왔다. 지휘관 권율이 과로로 잠깐 쓰러졌다. 그때 외모가 비슷했던 형 권순이 지휘하여 그 위기를 모면했다. 군관민 2,800명이 한마음 되어 싸웠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패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 같은 구원이 도착했다. 충청 수사 정걸이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게다가 양천으로 가는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지나갔는데, 적의 후방에서 이들이 내릴 기미를 보였다.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이라 오해한 일본군은 당황하여 물러갔다. 조선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1백여 명 이상을 참살했다.     


전투는 어둠이 내리는 유시(저녁 5시~7시) 경에 마무리되었다. 조선군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그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 후 권율은 주위에 널려 있는 일본군의 시체들을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일본군에 대한 권율의 적개심이 폭발한 것이다.     


조선군 2,800대 일본군 30,000의 행주대첩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것이나, 변이중의 화차와 이장손의 비격진천뢰 등 강한 화력의 최신식 무기가 승리의 원동력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 무기는 성리학에서 볼 때 잡학(雜學)의 산물이다.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성리학보다는 잡학의 산물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화차나 비격진천뢰와 같은 전쟁 무기를 생산하는 잡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아울러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다양한 분야의 잡학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변이중이나 이장손처럼 잡학에 능한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나라가 건강한 국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5-7] 웅천 해전(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