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6-2] 진주성, 수성이냐? 포기냐?

수필 임진왜란

명나라 2차 지원군이 의주에 도착했을 때, 왜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그 결과 평양성 전투에서 졌고, 개성도 내주었으며, 함경도 지방의 왜군도 철수했다. 설상가상으로 왜군은 성주 전투와 행주대첩에서 패했다.

1593년 일본군은 남해안까지 밀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장수는 일본과 강화회담을 추진했다. 반격을 시작한 조선으로서는 분통이 터진다.     


‘진주성을 공격하라.’ 일본군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것은 강화협상을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도 있고, 조선 침략 첫해에 가장 큰 패배를 당했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있다.


왜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의지가 확고하여 진주성만은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라.’ 하고 권고했다. 한편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도 진주성 근교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 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휘관은 고민이 깊어진다. ‘수성이냐?’ ‘포기나?’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것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오로지 그 판단은 지휘관의 몫이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로 왔다. 충청병사 황진이 7백 명,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5백 명, 의병장 복수장군 고종후가 4백 명, 부장 장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이 1백 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이 2백여 명 등을 거느리고 왔다. 이들은 초유사 김성일의 주도하에 수성을 논의했다. 진주 목사 서예원, 김준민, 이종인 등도 있었다.


1593년 7월 19일(6월 21일) 일본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7월 20일, 교전이 일어난 첫날이다.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죽였다. 초저녁과 2경, 3경에 공격해 왔다. 2경은 21~23시, 3경은 23~01시를 말한다.

진주성은 남쪽으로 남강이 흐른다. 왜의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은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보냈는데, 일본군이 흙으로 메웠다.


7월 21일(6월 23일), 적은 낮에 3회, 밤에 4회 등 7회 공격해 왔다.

7월 22일(6월 24일),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했다.

7월 23일(6월 25일), 적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조총을 퍼부었다.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했다. 낮에 세 차례, 밤에 네 차례의 공격을 막아냈다.

7월 24일(6월 26일), 적은 방책을 만들고 화전 공격으로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항복을 독촉했다.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우던 중 초유사 김성일이 병사했다.

7월 25일(6월 27일), 적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대나무로 공격용 대를 세워 하향 조준하여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하여 조선군 300여 명이 죽었다. 왜군은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 부사 이종인이 적을 베고, 군사들은 기름과 횃불을 던지며 저항했다.

7월 26일(6월 28일), 야간에 성을 뚫으려 하는 적 1천여 명을 죽였다. 유능한 관군 장교였던 황진이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전투의 패배를 결정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7월 27일(6월 29일) 황진을 대신하여 진주 목사 서예원에게 경비대장을 맡겼는데,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그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맡겼다. 그는 용감하게 싸웠으나 총탄에 맞았다. 동문의 성이 무너지고 왜군이 밀고 들어왔다. 이제는 창과 칼로 맞서는 육박전이다. 그 와중에 이종인마저 탄환에 맞았다. 김천일은 촉석루에서 항전하다가 아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최경회, 복수장군 고종후도 그랬다.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렇듯 제2차 진주성 전투(第二次晋州城戰鬪)는 7월 20일부터 27일까지 무려 8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날 오후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진주성의 함락을 애도하여 흘린 백성들의 눈물이다.     


이런 와중에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리는 자가 있었다. 장흥 부사 유희선이다. 그는 남해안으로 도망가면서 ‘일본군이 쳐들어온다.’ 하고 떠들어댔다. 그 소문이 전라도 남해안으로 퍼져나가 광양, 순천, 낙안, 강진, 구례 일대가 쑥밭이 되었다. 이런 자를 고을의 지도자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조정에서는 진주성 전투의 책임소재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영의정 류성룡은 ‘김천일이 의기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라고 말했다. 책임을 물으려면 진주 목사 서예원에게 물어야 하고, 이 전투를 진두지휘한 초유사 김성일에게 물어야 한다. 전투의 패배에 대한 진솔한 자기반성을 해야 할 자가 남의 탓만 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희생한 사람을 위로하기는커녕 비난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6-1] 임진왜란의 전쟁 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