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6부
1593년 명나라 2차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왜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그 결과 평양성 전투에서 졌고, 개성도 내주었으며, 함경도 지방의 왜군도 철수했다. 설상가상으로 왜군은 성주 전투와 행주대첩에서 패했다. 일본군은 남해안까지 밀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장수는 일본과 강화회담을 추진했다. 반격을 시작할 것으로 여겼던 선조는 분통이 터진다.
그때,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가 떨어졌다. 왜 그랬을까? 학자들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강화회담을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그 하나요, 조선 침략 첫해에 가장 큰 패배를 당했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그 둘이다.
왜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의지가 확고하여 진주성만은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라.’ 권고했다. 외교에 능한 능구렁이 고니시의 얄미운 작전이다.
한편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도 진주성 근교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 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지휘관에게 고민이 깊어진다. ‘수성이냐?’ ‘포기나?’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것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판단은 오로지 지휘관의 몫이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주변의 관군과 의병들이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왔다. 충청병사 황진이 7백 명,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5백 명, 부장 장윤이 3백 명 등 군사가 왔다. 복수의병장 고종후가 4백 명, 이계련이 1백 명, 변사정의 부장이 3백 명, 민여운이 2백여 명 등 의병도 몰려왔다. 여름날 불을 보고 모여든 불나방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모여들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초유사 김성일의 주도하에 수성(守城)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 진주 목사 서예원이 있었다. 거제 현감 김준민도 있었고, 김해 부사 이종인도 있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전개 과정을 1593년 6월의 날짜별로 살펴본다.
6월 21일(7월 19일) 일본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6월 22일, 교전이 일어난 첫날이다.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죽였다. 초저녁과 2경, 3경에 공격해왔다. 2경은 21~23시경, 3경은 23~01시경을 말한다. 진주성 남쪽으로 남강이 흐른다. 왜의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은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보냈는데, 일본군이 흙으로 메웠다.
6월 23일(7월 21일), 적은 공격해왔다. 낮에 3회, 밤에 4회 등 총 7회다.
6월 24일(7월 22일),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했다.
6월 25일(7월 23일), 적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조총을 퍼부었다.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했다. 낮에 세 차례, 밤에 네 차례의 공격을 막아냈다.
6월 26일(7월 24일), 적은 방책을 만들고 화전 공격으로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항복을 독촉했다.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우던 중 초유사 김성일이 병사했다.
6월 27일(7월 25일), 적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대나무로 공격용 대를 세워 하향 조준하여 사격을 가했다. 조선군 300여 명이 죽었다. 왜군은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 부사 이종인이 적을 베고, 군사들은 기름과 횃불을 던지며 저항했다.
6월 28일(7월 26일), 야간에 성을 뚫으려 하는 적 1천여 명을 죽였다. 유능한 관군 장교였던 황진이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전투의 패배를 결정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6월 29일(7월 27일) 황진을 대신하여 진주 목사 서예원에게 경비대장을 맡겼는데,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그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맡겼다. 용감하게 싸웠으나 그도 총탄에 맞았다. 동문의 성이 무너지고 왜군이 밀고 들어왔다. 이제는 창과 칼로 맞서는 육박전이다. 그 와중에 이종인마저 탄환에 맞았다. 김천일은 촉석루에서 항전하다가 아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최경회도 고종후도 그 뒤를 따랐다.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6월 21일부터 28일까지 8일 동안 계속된 제2차 진주성 전투(第二次晋州城戰鬪)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고,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날 오후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그 비는 구천의 진주성 백성들이 흘린, 통한의 눈물이다.
이런 와중에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리는 자가 있었다. 장흥 부사 유희선이다. 그는 남해안으로 도망가면서 ‘일본군이 쳐들어온다.’ 하고 떠들어댔다. 그 소문이 전라도 남해안으로 퍼져나가 광양, 순천, 낙안, 강진, 구례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이런 자를 고을의 지도자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김천일이 의기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
진주성 전투의 책임소재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영의정 류성룡이 한 말이다. 책임을 물으려면 진주 목사 서예원에게 물어야 하고, 이 전투를 진두지휘한 초유사 김성일에게 물어야 한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진솔한 자기반성은 없고 나라를 위해 몸 바쳐 희생한 사람을 비난하고 있다. 비겁한 자들이다.
남의 탓만 하는 국가 지도자들의 나쁜 버릇, 어떻게 해야 고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