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송유진의 난 (2)

수필 임진왜란 제6부

by 수필가 고병균

송유진은 당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보고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송유진은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칭하며, 오원종(吳元宗)·홍근(洪瑾) 등과 함께 한성으로 진군할 것을 약속했다. 그 결전의 날이 1594년 정월 보름날이다.

그러나 그해 정월, 직산에서 충청병사 변양걸(邊良傑)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송유진을 체포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조정에서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포고문을 선포했다.

1. 수령이 사려가 깊고 담력이 있는 자를 가려서 반란세력에 침투시켜 적의 동태를 자세히 살핀다.

2. 충청도에 장수 한 사람을 고정 배치시켜 그에게 반적을 체포하고 토벌하는 일을 일임한다.

3. 반적 중에 귀순하는 자는 죄를 면해주고, 반적의 두목을 체포하거나 목을 베는 사람은 후히 포상한다.

포고문이 선포되기 전에 충청병사 변양걸은 반란의 낌새를 알아채고 주모자를 찾으려고 온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모자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유진 일당을 체포하게 된 것은 진천에 사는 무사 김응룡의 계책 덕분이다. 그는 자기의 조카뻘 되는 홍각이 반란 주모자의 종사관으로 행세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이해타산을 따지며 설득했다. 아마도 포고문 제3항에 근거하여 설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며 반도의 실상을 파악했고, 송유진을 꾀어내게 했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송유진 일당을 포박했다. 여기서 잠깐 왕 선조는 포고문 제3항의 약속을 지켰을까? 홍근에게 후히 포상했을까?


선조는 안심하지 못했다. 송유진 일당을 체포했다고 하여 반란 세력에 대한 방비가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서울의 각 성문을 철저히 지키게 하는 한편 한강의 경비를 엄격하게 했다. 남산 위에는 장수와 병사들로 대오를 짜서 주야로 망을 보게 했다. 병조에 명하여 장사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여 대기시키고 조경을 포수대장으로 삼았다. 이와는 별도로 금군대장을 두어 입직을 서게 하고, 좌우영에 있는 화기, 화약, 궁시, 검창 등을 모두 대궐 안 군기시로 들여놓아 방비에 만전을 기했다. 용산창에는 용맹한 군사를 배치하여 항시 계엄을 하도록 했다. 영의정 류성룡과 병조판서 이덕형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서 숙직토록 하고, 모든 일을 수시로 변통하여 대처하도록 했다.

백성의 삶이나 나라의 안위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쓴 것이다.


송유진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를 국문할 때 대신과 양사의 장관만 참석했었고, 송유진을 포박하는 데 공을 세운 직산의 홍응기와 부장 송난생 등 7인을 입회시켰다. 그것은 반란과 무관한 사람들의 옥사를 막는다는 이유였다. 언뜻 공정한 것처럼 보인다.

정월 24일, 국문이 시작되었다. 송유진은 훈장 노릇만 하였을 뿐 괴수는 자신이 아니고 이산겸이라고 둘러댔다. 주모자 격인 김천수, 오원종, 유춘복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과 오원종으로 밝혀졌고, 송유진(宋儒眞)이 보낸 밀서에서 그가 반란의 괴수인 것이 드러났다. 그 말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본다.

“왕의 악정이 고쳐지지 않고, 붕당(朋黨)은 해소되지 않으며, 부역은 번거롭고 과중해서 민생이 편치 못하여 목야(牧野)에서 무용(武勇)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는 부끄러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죄를 추궁하노니, 실로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빛남이 있도다.”

(조경남(趙慶男),≪난중잡록(亂中雜錄)≫권 2, 갑오 정월).


또 다른 괴수 오원종은 수원에 살았던 한의사였다. 침을 잘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과 접촉하였고, 그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난의 주모자가 송유진과 오원종으로 밝혀졌음에도 선조는 이산겸을 숙청했다.

이산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에서 종사했다. 조헌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자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여 평택, 진위 등지에서 싸웠고, 건의대장 심수경의 휘하에서 지휘를 받았다. 그는 여러 지역으로 의병을 이끌고 다녔으나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그는 한때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송유진 일당에게 연루되었다고 하여 잡혀갈 때 그는 충청도가 아닌 전라도에 있었다. 또 송유진 일당을 잡아들이게 한 홍응기, 홍각 등과 대질했을 때도 이산겸은 주모자가 아니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선조는 기어이 그를 죽이고 말았다.


선조는 송유진 일당 체포에 공을 세운 홍각에게 상을 내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12월에 그에게 삭탈관직의 벌을 내렸다. 포고문 제3항은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약속을 지키는 것을 신용이라 한다. 그 신용이 나라를 지킨다. 그러나 왕 선조는 송유진의 난을 진압할 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신의 입맛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버렸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도 나라를 위해 충성할 마음이 사라진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 실로 하늘의 도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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