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의병장 이산겸의 숙청

수필 임진왜란 제6부

by 수필가 고병균

선조는 송유진의 난 이후 의병장 이산겸을 숙청했다. 이산겸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1594년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던 중 사망했다.

이산겸은 이지함의 서자였다. 실록에 따르면, 이지함이 처가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가족들을 데리고 섬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이지함에게 아들은 적자 셋과 서자 하나 있었다.


1593년(선조 26년) 11월, 류성룡은 명나라 장군 왕필적(王必迪)이 이산겸을 호평하며 이산겸을 중국 사신단에 대동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지함(李之菡)의 서자(庶子) 산겸(山謙)이 충청도 의병장이 되어 2월경에 개성부(開城府)에 왔다가 왕필적(王必迪)·오유충(吳惟忠)을 만났는데, 왕(王)이 신(臣)에게 서간(書簡)을 보내어 산겸을 크게 칭찬하기를 ‘어떻게 이처럼 간담(肝膽)이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사람을 배양해냈는가?’ 했고, 신도 만났는데 국력 강화의 불가함을 말했었습니다. 신은 이런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1월 21일자 기사)


그해 11월, 사간원이 의병 활동에 대해 보고할 때 이산겸을 언급했다.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은 강개스럽고 의기가 있으니 의병들이 그를 장수로 삼은 것은 반드시 중망(衆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변사에서 허통(許通)하자고 아뢴 것은 가장(嘉奬)하는 뜻만이 아니고 그 명칭을 중하게 여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의병을 모집하여 종군(從軍)한 자 및 계본(啓本)을 가지고 간 자들은 모두 허통하였는데 유독 이 사람에게만 아직껏 은명(恩命)을 아끼고 있으니 참으로 근왕(勤王)하는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사기가 꺾일까 두렵습니다. 대적을 멸하지 못한 지금 가벼운 일이 아니니 해조의 공사(公事)대로 시행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25년 11월 16일 자 기사)

이산겸이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어 취조받을 때, 그의 장형 산두(山斗)는 거인(據仁)을 낳은 뒤 사망했고, 둘째 형 산휘(山輝)는 호랑이에 물려 죽었으며, 셋째 형 산룡(山龍)은 열두 살 때 역질(疫疾)로 죽었다. 그런데 이산겸의 동생이라 하는 이산두가 끌려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산두 : 본명은 천두(天斗)였는데 산겸의 동생인 연고로 산두라 불렀습니다. 뜻이 같지 않으면 부자 사이에도 모르는 것인데 비록 동생이라 하더라도 다른 집에서 사니 그 가운데 있었던 일은 형세 상 알기 어렵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2월 14일 자 기사)

성룡 :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산두는 이미 죽었는데 산겸의 동생으로 와서 갇힌 자도 산두라 하니 심히 괴이합니다. (조선실록 선조 27년 2월 27일 자 기사)

산두는 산겸의 장형으로 이미 죽었다. 그리고 이산겸에게는 동생도 없다. 참 이상하다.

1593년 2월 6일, 선조는 이산겸을 친히 국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산겸 : (생략) 충청 감사가 신을 수금(囚禁)할 때도 또한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군기를 바치지 않았다는 혐의로 가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도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송유진(宋儒眞)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성명 또한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이 연소한 서얼로 의병을 거느렸으므로 필시 이 때문에 신의 이름을 듣고 끌어댔을 것입니다. 신의 집문서를 수색해 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지어 옷 안에 품고 무군사 앞에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이미 도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도피하면 임금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겠고 늙은 어미를 버리고 죽으면 어버이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겠기에 궐하(闕下)에 나아가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성룡 : (자복하지 않는 이산겸에게) 압슬형을 가하소서.

선조 : 왜적을 토벌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의병을 모집한 것은 단지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서인데 왜적을 토벌하지 아니했다면 바로 의병을 빙자하여 그 흉모(兇謀)를 수행하려 함이 아닌가.

이산겸은 자백하지 않았다. 압슬형을 가해도 승복하지 않았다. 선조는 형벌을 더 가할 것을 지시한다. 그래도 이산겸은 자신의 죄상이 적힌 공초에 서명하지 않았다.

선조 : 충청 감사는 이 사람이 분명히 적의 우두머리로서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였는지 모르겠다. 만약 단지 도적이나 그의 공초(供招)에만 의거한다면 참으로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 역적은 무거운 형옥(혈벙f과 감옥)인데 어찌 억측으로 이루어져서야 되겠는가? (의심한다)

성룡 : 조헌도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았는데 이 사람은 그 막하(幕下)로서 사람됨이 범람한 듯하니 남의 미움을 받아 의심을 사게 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의심을 품고 있다)


선조는 내심 의심하면서도 고문을 자행했다. 압술을 가하고 낙형(烙刑)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압술’은 죄인의 무릎과 허벅지 위에 무거운 물체를 올리거나 널판지를 깔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서 압박을 가하는형벌이고, ‘낙형’은 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지는 형벌이다. 이가 갈리고 몸서리가 쳐지는 형벌이다. 그래도 이산겸은 자백하지 않았다. 더는 형벌을 가할 수 없게 되자 선조는 ‘하옥하라.’ 명한다. 이후 이산겸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기록을 참고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산겸이 의병을 장악하고 해체하지 않은 그 정상이 의심스럽다.’ 하여, 형추(刑推)하도록 명함으로써 형장 아래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7년 1월 1일 자 기사)


선조는 의병장 이산겸을 숙청했다. 죄명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극심한 고문을 가해 숙청했다. 아니라 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압술의 고문, 낙형의 고문 등 진저리를 치게 하는 고문이 가해졌다. 기어이 죽이고 말았다.

세상을 잘못 만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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