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6부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1596년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설상가상으로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이런 경우 나라에서는 어찌해야 할까?
해남 윤선도 가문에서는 흉년이 들면 창고의 문을 열었다. 지방의 토호들도 잘 사는 가문에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다. 그런데 조선의 왕 선조는 어떻게 했을까?
선조는 일본의 재침을 방비한다는 이유로 각처의 산성을 수축했다. 그러면서 백성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그 결과 민중의 부담은 가중되고, 원성은 높아졌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민란이 일어난다. 1594년에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고, 그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2년 후 이몽학의 난이 또 일어났다.
이몽학은 왕실의 서얼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는 한현의 선봉장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동갑회를 조직했다. 이들도 서얼 출신으로 이몽학과 동병상련(同病相燐)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뒷골목의 패거리 동료가 된다.
한현은 어사 이시발(李時發)의 휘하에 있으면서 호서 지방의 군사를 조련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받았다. 민심이 이반되고 한성의 방비가 허술함을 알아차리고 이몽학과 함께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때 한현은 자기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洪州 : 지금의 홍성)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사할 것을 이르고 자신은 내포(內浦)로부터 상응하겠다고 약속한다. 그것은 거사의 성패를 관망하려는 기회주의자의 행동이다.
이몽학이 김경창(金慶昌)·이구(李龜)·장후재(張後載), 도천사(道泉寺) 승려 능운(凌雲), 사노(私奴) 팽종(彭從) 등과 함께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주둔할 때, 그가 인솔하는 승속군(僧俗軍)은 무려 600 ∼ 700명이나 되었다. 기세가 등등했다.
이몽학 일당이 난을 일으킨 날은 1596년 7월 6일(7월 30일), 홍산현을 습격해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붙잡았고, 임천군(林川郡 현 부여군의 남무지역)을 습격해서 군수 박진국(朴振國)도 납치했다. 7일에는 정산현(定山縣 현 청양군 정산면)을,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 현 청양읍, 대치면, 운곡면, 남양면, 비봉면 일대)을 함락한다. 정산 현감 정대경(鄭大卿)과 청양 현감 윤승서(尹承緖)는 도망하였다. 9일에는 대흥군(大興郡 현 예산군 대흥면)을 함락하니 군수 이질수(李質粹)는 산중으로 도주하여 적정을 보고했다.
수령들은 무기력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거나 도주하였고, 이민(吏民)들도 반군에게 복종하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반군을 돕는 수령도 나타났다. 부여 현감 허수겸(許守謙)은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자 문서를 전해주었고, 서산 군수 이충길(李忠吉)은 아우 3명을 반란군에게 보내 도와주었다.
반면 이몽학 반군에 맞서 싸운 의로운 수령도 있었다. 홍주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주관속(州官屬) 이희(李希)·신수(申壽) 등을 반군 진영에 보내어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어에 따른 시간을 버는 한편, 인근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을 불러 모았다.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도 인근 수령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충청 수사 최호(崔湖)가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으로 입성했다. 용감한 홍주 목사 홍가신(洪可臣)이 반란군과 맞서 싸운다. 그러자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言)이 무량사에 이르렀고, 어사 이시발은 유구(維鳩)에, 중군(中軍) 이간(李侃)은 청양에 포진하여 도왔다.
반란군의 기세가 꺾였다. 11일 새벽, 이몽학은 덕산(德山)으로 달아나고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했다.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라는 격문을 둘렸다.
반란군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몽학은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참수되고, 기회주의자 한현은 홍주에서 홍가신에게 잡혔다.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반란의 상처는 컸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이 33명, 외방에서 처형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연좌율(緣坐律)을 적용하면 그 수가 너무 많아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하여 희생자를 가급적 줄였다.
그렇다고 하여 반란의 뒤처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심문하는 중에 반도들의 입에서 김덕령(金德齡)·최담령(崔聃齡)·홍계남(洪季男)·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등 의병장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중 김덕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장살(杖殺) 당했었고, 최담령도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무인사건(誣引事件)이라고 한다.
최담령은 어떤 자였을까?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수천 명을 모았고, 자기 집안의 재산을 털어서 군수물자를 보급했던 인물이다.
남원 광한루에서 김덕령과 함께 군사작전을 의논하였는데,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부장으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 군대를 의령군이라 불렀다. 두 장군은 광한루에 포진하여 10여 일간 맹훈련을 시킨 후 영남으로 진군했다.
김덕령이 ‘군사가 1만 명도 못 되는 것’을 걱정하자 최담령은 ‘전쟁의 승패는 장수에게 달려있는 것인데, 어찌 군사의 많고 적음을 논하리오.’라고 위로했다.
최담령은 용감했다. 진주에서 방어할 때, 적의 우두머리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겁을 먹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1595년(선조 28) 의령의 싸움에서는 적의 푯말을 엉뚱한 곳으로 옮기고 그들을 공격하여 무찌르기도 했다.
김덕령은 최담령을 변호했다. ‘신은 비록 죽습니다만 원하옵건대 최담령은 허물이 없으니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변호했다. 그러나 선조는 기어이 죽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