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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6-7] 김덕령의 출병

수필 임진왜란

1594년 1월 1일, 선조는 김덕령에게는 충용장(忠勇將)을, 그 군대에게는 충용군(忠勇軍)의 군호를 내린다. 그러나 기치를 내리는 일은 보류한다. 기치(旗幟)란 군대에서 쓰던 깃발이다. 이것은 선조의 기대가 그만큼 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김덕령은 출병하기 전에 서울로 가서 선조의 해명을 받아야 한다. 김덕령은 그 절차를 밟지 않았다. 무언인가 어긋난 듯하다.      


1594년(선조 27년) 1월 2일 좌의정 윤두수가 ‘영남의 전선이 위태하니 김덕령의 충용군을 경상도로 보내겠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1월 3일 김덕령 자신도 경상도로 떠나기를 청하였다.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과 정6품 좌랑의 벼슬을 내린다. 

1월 6일 김덕령은 장성 입암산성과 담양 금성산성에서 훈련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담양 추성관으로 모이라는 격문을 띄운다. 그 내용이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에 인용되어 있는데 그 포부는 엄청나게 크다.


“김덕령 군의 예정 경로는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남원-운봉-함양-산음-단성-삼가-의령-함안-창원-김해-동래-부산-동해-대마도를 거쳐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      


김덕령의 충용군은 담양에서 보름가량 대기하며 추가 모병하여 병력이 3천에 이르렀다. 그때 해남 현감 위대기와 군산 만호 이세침이 합류하였다. 


1월 2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전라도 담양에서 순창을 거쳐 남원에서 머문다. 그러는 동안 조방장(助防將) 곽재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명령을 받겠다.’라는 서신을 보내고, 최담령을 별장으로 삼아 의병 훈련에 들어간다.     

2월 초 분조에서 실시한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시켰다. 이로써 충용군은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가 되었다. 충용군은 경상도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일본군 토벌 계책을 논의했다. 그때 조정에서 김덕령에게 전교를 내린다. ‘진해·고성의 경계에 머물면서 경상도 거제, 진해, 함안 등지에서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방어하라.’라는 내용이다. 이 전교는 일본군 토벌 계획을 무효화시키고, 도원수 권율의 지도력에 타격을 주었다. 


2월 2일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의 환아정(換鵝亭)에 본진을 마련한다. 

2월 3일 함안 부근 남산리(오늘날의 함안군 장지리·사내리 일부)에 도착해 산정에 가시나무 울짱(울타리의 다른 말)을 두고 진을 치고, 별장들에게 병사를 매복케 하였다.


2월 5일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1559~1614)이 고성에 나아가 일본군 수백 명과 맞서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다. 2월 8일 최강이 창원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한 명의 수급을 베었다. 두 번의 고성 전투는 최강의 전공이며, 김덕령의 전공으로 보기 어렵다.


2월 7일 김덕령은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 밖 5리쯤 되는 곳에 들어갔다. 일본군의 위세가 진주성 전투 때와 비슷했으며, 매복해 있던 일본군 네댓 명이 칼만 휘두르다 웅천(熊川)과 김해(金海) 등으로 돌아갔다.

2월 10일 새벽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여러 별장을 거느리고 각각 300여 명을 인솔하여 전날 매복했던 곳에서 일본군의 허리를 끊게 했다.

2월 27일 김덕령의 충용군이 산음에 주둔한다. 이때 군량 부족에 시달린다.


3월 2일 김덕령은 조정에 치계(馳啓)한다.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함을 들어, 예하 3천여 병력 가운데 호남 군사로 벼슬한 자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조정에서도 상황이 심각함을 알고, 위급할 때만 징병하고 평상시에는 둔전을 설치하여 운용토록 한다. 둔전(屯田)이란 ① 주둔병의 군량을 자급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밭. ② 각 궁과 관아에 딸렸던 밭 등 두 가지의 뜻이 있다.


4월 1일 (또는 4월 1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산음을 떠나 의령을 거쳐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는 대곡면 대곡리)로 옮겼다. 진주 대곡리는 함안과 고성 사이에 있어,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 지나야 할 요충지다.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그해 4월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변사정의 적개의병(敵愾義兵) 그리고 정인홍의 경상도 의병들을 해산하거나 그 일부를 충용군에 소속시킨다. 나이 28세의 김덕령은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었다.


9월 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경상도 고성(固城) 지방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싸웠으나 단 한 명도 베지 못하고,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구해 왔다. 김덕령이 보여준 유일한 공이다. 김덕령은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는 ‘속 빈 강정’이었다.      


9월 21일 선조는 권율, 이빈, 곽재우 등의 육군 지휘관과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 수군 지휘관에게 포상하면서 김덕령에게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하였다. 아직도 선조에게는 김덕령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다. 


김덕령은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기대에 부응하는 것일까? 나는 결혼식을 마친 우리 아이들에게 ‘잘 살아야 한다.’ 당부한다. 그것이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같은 이치로 김덕령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성과를 거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대에 부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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