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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6-6] 장문포 해전과 이순신

수필 임진왜란

1594년 11월 12일(음력 10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 장문포 일대에서 벌어진 장문포 해전(長門浦 海戰)은 이상한 전투였다. 장문포는 경상도 동래부 장림포 現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동이다. 그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장문포 해전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하삼도를 감독하기 위해 내려온 체찰사 윤두수에게 건의하여 수행된 전투이다.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전투를 수행하려면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먼저 건의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도체찰사 윤두수에게 직접 건의했다. 이것이 이상하다.


원균은 전투에서 거둔 공적이 없다. 윤두수는 문관으로 전쟁에 관해 문외한이다. 이런 자가 올린 전투에 대하여 비변사는 반대했다. 그런데 선조는 그것을 허락했다. 


조선은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서조차도 무관보다는 문관을 우대한 증거이다.      

1594년 당시 이순신은 전투를 수행할 형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이유 하나는 명과 일본군이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기에 일본군은 성을 쌓았다. 마치 교과서처럼 성을 튼튼하게 쌓았다. 그리고 그 성에 들어간 일본군은 조선의 수군이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수군만으로는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 육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다른 이유는 전투에 투입할 병사가 부족한 점이다. 장문포 해전을 수행한 시기는 11월로 농촌에서는 벼를 수확하는 시기다. 이순신은 휘하의 병사들을 고향으로 보내 농사일을 돕게 했다. 백성을 사랑하는 이순신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수행하려면 이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그 일이 쉽지 않다. 연락하는 일이 쉽지 않다. 연락되었다 해도 전라도 순천 나주 영광 목포 등지에 흩어져 있는 병사를 전투 현장 장문포로 모이게 하기까지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싸워보았자 별 소득이 없다. 이순신은 이렇게 판단했다. 이런 합리적인 이유가 있음에도 싸우지 않으면 어찌 될까? 조정의 대신들이 받아들일까? 어림없는 수작이다.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명을 씌워 이순신을 탄핵할 게 뻔하다. 


장문포 해전은 지금까지 이순신이 수행한 해전과 전혀 다른 해전이다. 이제까지 수행한 해전은 일본의 함선이 바다로 나와 있거나 아니면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격멸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왜성에 숨어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전투이다. 육군과 수군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전투이다.      

출전하는 이순신의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배를 띄워야 한다. 


1594년 11월 12일(10월 1일) 1차 장문포 해전이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조선 수군은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서 출항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0여 척이 함선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육군 병사들이라 노를 젓는 일이 서툴러서 배가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만 있다. 어렵사리 영등포로 들어가 일본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일본군은 바닷가에 배를 대놓은 채 항전하지 않았다. 해 질 무렵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 배를 매려 할 즈음, 적의 화공을 맞아 배에 불이 붙었으나, 번지기 전에 진화하였다. 


여기서 또 이상하다. 전투를 건의한 원균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1월 15일(음 10월 4일)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의병장 곽재우, 충용군 김덕령 등 육군과 함께 수륙 합동 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육군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작전을 총지휘해야 할 도 체찰사 윤두수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을까? 학자들은 권율은 전라도 구례에 있었고, 윤두수는 충청도에 있었다고 말한다. 또 이 전투를 맨 처음 건의한 자는 경상우수사 원균이다.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이 전투를 건의한 수군의 원균과 체찰사 윤두수는 물론 육군의 도원수 권율까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수수방관(袖手傍觀) 한 것으로 여겨진다.      


12월 28일(음 11월 17일) 2차 장문포 해전이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일본이 명으로 더불어 화친을 의논하는 터이니 싸울 것 없다.’ 이런 팻말을 꽂아놓은 채 도주하고 말았다. 12월 29일 이순신은 수륙군을 해체하고 한산도 통제영으로 돌아왔다.     


총 6일 동안 치른 장문포 해전에서 왜군 함정 2척 만을 격침시켰을 뿐 전과는 미미했다.      


다시 말하지만, 장문포 해전은 경상 우수사 원균이 건의한 해전이다.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가 자의로 수행한 수륙 합동 작전이다. 선조가 허락한 전투이다. 그런데 나중에 영의정 류성룡 등에 의해 선조의 재가를 받아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졌으며,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원균에 의하여 작전이 이미 전개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당연히 원균이다. 그런데 선조는 윤두수만 체직하였을 뿐 원균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웅 이순신은 해전을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선조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그것이 무척 안타깝다. 

조선의 왕 선조가 자신의 나라 조선을 무너뜨리고 있다. 불공정한 그의 행태가 나라를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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