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이상한 장문포 해전

수필 임진왜란 제6부

by 수필가 고병균

장문포 해전(長門浦 海戰)을 두고 학자들은 ‘이상하다.’고 말한다. 장문포 해전은 1594년 9월 29일(11월 11일)부터 10월 8일까지 장문포(거제 장목면 장목리), 영등포(거제 장목면 구영리), 오 비질포(거제 연초면 오비리) 등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상할까? 무슨 사연이 있을까?


장문포 해전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건의하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하삼도를 감독하기 위해 내려온 체찰사 윤두수가 주도한 작전이다. 이상하게도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투를 수행할 형편이 아니라.’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들어본다.

첫째, 명과 일본이 강화회담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군은 성에 들어가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싸우려면 육군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둘째, 전투에 투입할 병사가 부족하다. 장문포 해전을 수행한 음력 9월과 10월은 벼를 수확하는 시기다. 이순신은 휘하 병사들을 고향으로 보내 농사일을 돕게 했다.

이들 병사를 불러 모아야 한다. 전라도 순천 나주 영광 목포 등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에게 연락해야 한다. 그 일이 쉽지 않다. 또 연락이 닿았다고 해도 병사들이 반드시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셋째, 별다른 소득이 없다. 이순신은 소득이 없는 전투에는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선조는 원균의 의견을 받아준다. 비변사의 건의도 무시하고 받아주었다. 영의정 류성룡 등 대신들도 반대했다. 그러자 선조는 마지못해 ‘작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원균이 전투를 시작했다. 독단적으로 시작했다.

장문포 전투는 이순신이 반대한 전투이다. 비변사도 반대하고 조정의 대신들도 반대한 전투이다. 그 전투를 원균이 건의하고 원균이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항했다. 그런데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맴을 돌고만 있다. 병사들이 노를 저을 줄 모른다. 그 참담한 전투 상황을 날짜별로 정리한다.


1594년 9월 29일(11월 11일), 장문포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저들은 험준한 양쪽 봉우리에 벽루를 쌓고 항전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적의 선봉선 2척을 공격하여 분멸시켰다. 이게 제1차 장문포 해전이 거둔 소득이다.

10월 1일(11월 12일), 조선 수군은 영등포의 왜군을 향해 화전(火箭)과 반궁(半弓)을 쏘며 싸움을 걸었다. 일본군은 모래 위로 배를 올려놓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해 질 녘, 일본 군선 8척이 나와 조선의 전선 1척에 불을 지르고 군졸 1명을 죽이고 도주했다. 저녁에 공격하여 사후진 소속의 병선 3척이 실종되고 군졸 대부분이 피살되었다. 사도진 소속 병선도 공격을 받아 수직(守直) 하던 군졸 중 피하지 못한 자들이 모두 피살되었다. 이게 영등포 해전으로 조선 수군의 피해가 심각하다.

10월 2일(11월 13일) 평명(平明) 곧 아침 해가 돋아 날이 밝아질 무렵에 조선 수군은 장문포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높은 봉우리에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총을 쏘아댔다.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외질 포(外叱浦, 칠천량)에 진을 쳤다.

10월 3일(11월 14일) 진시(辰時, 아침 8시경)에 장문포의 강어귀에서 공격했다. 일본군이 대포를 쏘았더. 그 탄환이 주먹만 하고 3백여 보나 멀리 날아왔다. 1보를 75cm라 하면 300보는 22,500cm이다. 따라서 포의 사거리는 무려 225m나 된다. 육지에서 포를 쏘아대는 적을 바다로 끌어낼 방법이 없었다. 이게 제2차 장문포 해전이다.

10월 4일(11월 15일), 수륙 합동 공격을 계획했다.

첫째, 곽재우·김덕령 등은 육군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상륙한다.

둘째, 선봉선을 장문포에 파견하여 들락날락하면서 싸움을 걸게 한다.

셋째, 이순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수륙이 서로 호응하게 한다. 원균은 자신이 거느린 선박에서 육전을 자원한 자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에게 보냈다. 이게 원균의 실적이다.

당일 묘시(아침 6시경)에 명화비전(明火飛箭) 혹은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쏘며 공격했다. 일본군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날 칠천도에는 선전관 이계명이 와 있다. 표신(궁궐 문표)과 선유교서, 임금이 하사한 담비털가죽 등을 가지고 왔다. 선조는 원균을 끔찍이도 생각한다.

10월 6일(11월 17일) 새벽, 장문포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지금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하는 중이니, 싸울 수 없다’(日本與大明方和睦云) 이런 때문만 꽂아둔 채 응하지 않았다.

10월 7일(11월 18일) 묘시(아침 6시경),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서 적선 2척을 불살랐다. 칠천도 진(陳)에 왜병 한 명이 항복하겠다고 왔다. 오비질포 해전의 소득이다.

10월 8일(11월 19일), 한산도로 귀환했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장문포 해전은 조선군에게 패전이다. 그러나 일본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수군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고 있다. 자기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선 수군이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에 거제도를 바로 건너지 말고 부산포를 경유하여 거제도로 들어오라.”

조선의 반응은 어떠한가? 왕 선조는 장문포 해전의 책임을 물어 윤두수를 체찰사와 좌의정에서 면직했다. 영의정 류성룡은 ‘군인들이 전의가 없는 것은 매우 한심한 일’이라고 말하며 육군의 도원수 권율과 수군의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싸잡아 비난했다.

선조는 원균에 대하여 어떻게 조치했을까? 아무런 징계도 내리지 않았었다. 징계는커녕 ‘전투할 형편이 아니라.’고 말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참 이상하다. 선조가 이상하고, 대신들도 이상하다. 이런 조선이 정말 이상하다.


매거진의 이전글[6-7] 김덕령의 출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