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1595년(선조 28년) 말까지 김덕령은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그러나 강화회담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적었고, 이와 함께 군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사건이 빈발했다.
김덕령은 도망자 몇 사람을 붙잡아 처벌했다. 그러자 막료와 군사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고, 비변사에 보고되었다. 윤근수가 그를 진주 옥에 가두었다. ‘제1차 김덕령 옥사’이다
1595년 4월, 해평부원군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일본군의 동태, 명나라 군대의 움직임, 그리고 조선군의 동향 등을 파악하라.’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전라도와 경상도 각 지역을 돌아보다가, 진주에서 김덕령을 만난다. 여기서 자신의 노복이 문초를 받고 있음을 알고 김덕령에게 선처를 부탁했다.
9월, 윤근수는 ‘특산물 조달의 현지 조사’를 위하여 체방사가 되어 다시 진주를 방문했다. 석방을 부탁한 그의 노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분노한 윤근수는 김덕령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여 진주 옥에 가둔 것이다.
지휘관에게는 군율에 따라 장졸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 따라서 의병장 김덕령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하며,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청원서를 보낸 자가 있었다. 바로 진주 출신 부사 성여신과 진주 유생 박흥주이다.
1596년(선조 29년) 1월, 김덕령이 의금부로 옮겨 국문을 받았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 등이 석방을 요청한다.
1월 8일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고, 선조도 풀어주라 명하였다.
1월 13일 사헌부에서 두 개의 요청이 올라왔다. 하나는 김덕령의 처벌을 간한 것이요, 또 하나는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에 대하여 추고를 청한 것이다. 이때에도 선조는 처벌을 허락하지 않았다. 낭청(郎廳)이란 조선시대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당하관을 낭관(郎官)이라고 불렀는데, 낭청(郎廳)은 그 낭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1월 15일 사헌부가 세 번째 청을 하자 하는 수 없이 의금부 압송을 허락한다.
1월 17일 이호민·류성룡 등이 풀어주도록 청한다.
2월 28일 선조의 특명으로 김덕령이 풀려나왔다. 감옥에 갇힌 지 4개월 만이다. 선조는 그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주라고 명한다.
3월 3일 이덕형의 요청을 받아들인 선조가 ‘김덕령을 오게 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그는 3월 1일 군중으로 내려간 뒤였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대장을 삼기에는 알맞지 않고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한 자’라고 김덕령을 평하였다. 제1차 옥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1596년(선조 29년) 7월 6일 충청도 홍산(鴻山) 지역에서 왕족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켰다. 그는 ‘충용장 김덕령과 의병장 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 이런 헛소문도 퍼뜨렸다.
7월 12일 도원수 권율이 충청병사 이시언의 요청을 받아 전라감사 박홍로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했다. 권율은 반란군의 세력이 많음을 알고 충용장 김덕령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명령하였다.
7월 14일 김덕령은 경상도 진주를 출발하여 15일 단계에서 유숙하고 16일 함양에 도착했다. 17일 도원수 권율로부터 ‘반란이 진압되었다.’라는 전령을 받았다. 김덕령은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 진주 진소(陣所)로 돌아간다.
김덕령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몽학이 지닌 문서에 ’김·최·홍‘의 세 성(姓)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도원수 권율이 홍주 옥에 갇힌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을 심문하니 그는 ‘김덕령·최담령·홍계남이다.’ 라고 하면서 ‘곽재우와 고언백도 모두 나의 심복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김덕령을 모함하는 자가 나타났다. 7월 18일에 충청도 순찰사 이정암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김덕령을 체포하라.’라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과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경서(金景瑞) 등도 밀계(密啓)하여 ‘김덕령이 반역할 정황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영의정 류성룡도 그 말에 동조하였다.
선조는 동부승지 서성(徐渻)을 보내 김덕령을 잡아 오도록 하였다.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이 성윤문(成潤文)에게 진주 옥에 가두어둔 상태였다.
7월 27일, 서성은 김덕령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제2차 김덕령 옥사’이다.
서성은 장계를 올렸는데, 거기에 四日遲留 觀望成敗(4일지유 관망성패) ‘나흘 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바라보다.’라는 말이 있었다. 김덕령이 14일 진주를 출발하여 16일이 될 때까지 경상도 함안에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나흘 동안 머뭇거렸다고 적었는지 모른다. 그 여덟 글자가 죄목이 되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부하 의병들에게 자기 처자의 의복을 나누어준 곽재우와 진영에서 도망친 부하를 매로 쳐서 죽인 김덕령 이 둘 중 마음이 온유한 자는 누구인가? 상대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죽어야 하는 비정한 상황에서도 이 구절은 그대로 적용된다. ‘온유한 자’라는 말이 자꾸만 되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