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제1차 김덕령 옥사

수필 임진왜란 제6부

by 수필가 고병균

광주광역시에는 충장로가 있고, 충장사도 있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의 별칭이 충장부대이다. 모두 충장공 김덕령을 기리기 위한 이름이다. 그런데 역사에서 김덕령 옥사(獄事) 사건이 소개된다. 그것이 두 번이나 있다. 무슨 일일까?


1595년(선조 28년) 말까지 김덕령은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는데, 강화회담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러자 군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빈발하게 일어났다.


군의 기강이 해이해지면 안 된다. 내가 군 복무할 때의 일이 생각난다.

나는 포병 부대에서 복무했다. 155mm 곡사포 6문이 있는 부대였다. 포 1문에 부대원은 15명이다. 분대장으로 하사 1명이 있고, 4.5t 포차 운전병 1명 나머지는 포병이다.

‘이동 준비!’ 명령이 떨어지면 4.5t 포차에 포를 걸어야 한다. 먼저 포신을 내린다. 바퀴가 땅에 닿을 때까지 작기질을 하여 내린다. 다음에는 포다리를 들어 올린다. 포다리 하나에 포병 4명이니까 모두 8명이 동시에 들어 올린다. 이때 분대장은 포다리 위에 올라서서 운전병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포의 고리를 포차의 갈고리에 걸도록 뒤로 앞으로 좌로 우로 포차를 움직여야 한다. 운전병이 서툴면 포병들은 죽어난다.

훈련장에 도착하면 포를 설치한다. 운전병은 포차를 후진하여 포를 진지를 밀어 넣는다. 이때 분대장이 수신호를 보내 적당한 위치로 유도한다. 포병 여덟 명이 포다리를 들어 견인차에서 포를 떼어내고 포다리를 쫘악 벌려 내려놓는다. 일부 포병은 포다리를 안치할 지점에 땅을 파고 한편에서는 지휘부에서 알려준 방위각과 사각에 따라 포 다리고 좌우로 움직여 포신의 방향을 맞춘다. 포가 뒤로 물러나지 않도록 통나무를 받혀 고정하고 포의 바퀴가 땅에서 떨어질 때까지 작기질하여 포신을 들어 올린다.

이 모든 작업이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분초를 다투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여야 한다. 기강이 해이해지면 사고가 난다. 그래서 현명한 지휘관은 적당한 훈련을 통해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게 한다. 그렇게 하며 전투에 대비한다.


그런데 김덕령의 부대에서 도망친 병사가 있었다. 김덕령은 그런 자들을 붙잡아 처벌했다. 그러자 막료와 군사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비변사에 보고되었다. 윤근수가 김덕령을 진주 옥에 가두었다.


1595년 4월, 해평부원군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일본군의 동태, 명나라 군대의 움직임, 그리고 조선군의 동향 등을 파악하라.’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전라도와 경상도 각 지역을 돌아보다가, 진주에서 김덕령을 만난다. 거기서 자신의 노복이 문초를 받고 있음을 알고 김덕령에게 선처를 부탁했다.

그해 9월, 윤근수는 ‘특산물 조달의 현지 조사’를 위한 체방사가 되어 다시 진주를 방문했다. 석방을 부탁했던 그의 노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분노한 윤근수는 김덕령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여 진주 옥에 가둔 것이다. ‘이것이 제1차 김덕령 옥사’이다.


지휘관에게는 장졸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 따라서 의병장 김덕령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렇게 주장하며,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청원서를 보낸 자가 있었다. 바로 진주 출신 부사 성여신과 진주 유생 박흥주이다.

1596년(선조 29년) 1월, 김덕령은 의금부로 옮겨 국문을 받았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 등이 석방을 요청한다.

1월 8일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였고, 선조도 풀어주라 명하였다.

1월 13일 사헌부에서 두 개의 요청이 올라왔다. 하나는 김덕령의 처벌을 간한 것이요, 또 하나는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에 대하여 추고를 청한 것이다. 낭청(郎廳)이란 조선시대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당하관을 낭관(郎官)이라고 불렀는데, 낭청(郎廳)은 그 낭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조는 이들의 처벌을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5일 사헌부가 세 번째로 청하자 하는 수 없이 의금부로 압송을 허락한다.

1월 17일 이호민·류성룡 등이 풀어주도록 청한다.


2월 28일 선조의 특명으로 김덕령이 풀려나왔다. 감옥에 갇힌 지 4개월 만이다. 선조는 그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하사했다.

김덕령을 아끼는 선조의 마음이 각별함을 느낀다


3월 3일 이덕형의 요청을 받아들인 선조가 ‘김덕령을 오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3월 1일에 군중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이로써 제1차 김덕령 옥사는 마무리되었다.

선조는 알현하지 않고 군중으로 내려간 김덕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대장을 삼기에는 알맞지 않고,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한 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후 조선 반도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전투가 잠시 뜸해진 1594년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고,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선조는 의병장 이산겸을 숙청했다. 그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596년(선조 29년) 7월 6일 충청도 홍산(鴻山) 지역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다.

아.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떤 피바람이 불 것인지 온몸이 오싹해진다. 선조가 다스리는 나라 조선의 백성은 편할 날 없다. 참으로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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