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광주광역시에는 충장로란 길이 있고, 충장사란 사당도 있다. 그리고 육군 제31보병사단의 별칭이 충장부대이다. 모두 충장공 김덕열을 기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김덕령의 죽음에 대하여 무고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무고였을까?
1596년(선조 29년) 8월 4일 선조는 김덕령을 국문했다.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았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 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아뢴다. 선조는 그걸 듣더니 사가(私家) 한 칸에 따로 가두게 했다. 그 이후 8월 21일까지 6회에 걸쳐 친국하였다.
8월 8일 김덕령의 심복 최담령을 친국한다. 최담령은 전라도 부안에 있는 처자를 만나러 갔다가 잡혀 올라왔다.
8월 14일 최강·김언욱 등 김덕령의 참모들을 추국하여 신속 처리케 한다.
8월 16일 2차 친국에 이어 18일 3차, 19일 4차, 20일 5차 친국이 이어진다.
친국을 진행하는 도중에 선조는 신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행지중추 부사(行知中樞府使) 정탁(鄭琢)과 김응남(金應南)은 ‘김덕령이 반역하지 않았다.’라고 답하나, 증거가 없음을 들어 여러 차례 구명했다. ‘김덕령의 이름이 반란군의 공초에 많이 나오지 않는다.’라는 점을 감안하여 신중한 처리를 주장하였고, 김덕령의 구명을 위한 상소문 〈김덕령옥사계〉(金德齡獄事啓)를 지었다.
김덕령 자신도 죄가 없음을 거듭 주장했다.
“비록 도적들의 한 말이 그와 같을지라도 공모했다면 반드시 오고 간 자취가 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저에게 터무니없는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저 역적 무리가 국가에서 저를 쓰지 않도록 하게 하려고 시기하여 모함하는 흉계를 부린 것입니다. 제가 우러러 받드는 군부의 앞에서 분변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발명(發明)하겠습니까?”
그런데 영의정 류성룡은 대답이 없다. 선조가 다시 물으니, ‘이 뒤에 만일 어떠한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긴다면 김덕령같이 용맹한 자를 놓아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일 수 있을는지는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정탁처럼 죄가 ‘있다.’ ‘없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류성룡은 ‘뒤에’ ‘만일’ 논리로 대답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8월 21일 6차 친국에서 김덕령은 수차례 고문을 당하여 목숨만 겨우 남아 있었으나 행동거지는 평상시와 같았다. 그날 마지막에 선조가 국문장의 신료들에게 물었다. ‘구명할까?’ 여겨 물었다. 예수냐? 바라바냐? 하는 빌라도의 물음과 같은 의미다. 그런 안타깝게도 그를 살려야 한다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역적들의 공초에 많이 나온 자가 김덕령이어서 마땅히 추문(推問)해야” 하고, “김덕령은 송유진(宋儒眞) 때에 자주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었으나 그때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현(韓絢)의 초사(招辭) 속에 나왔으니, 이는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하며 김덕령을 살리는 데 소홀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동인인 류성룡은 김덕령에게 죄가 있음이 확실하니 다른 죄인이 다다를 때까지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이며 윤근수의 형제인 판중추 부사 윤두수는 즉시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류성룡은 살 도리가 없으니, 그의 일당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기를 바랐고, 놓아주는 일도 반대했다.
훗날 현종 대(1668년; 현종 9년)에 그 일을 다시 거론한다. 치대(置對) 함에 미쳐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선조가 여러 신하에게 묻자, 류성룡이 “이치상 반드시 살려둘 수 없다.”라고 말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다른 기록에서도 류성룡은 ‘상황이 이러하니 살게 될 수는 없다’라는 전제(前題)를 말하면서 김덕령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음으로써 훗날 두고두고 “류성룡이 김덕령을 죽이게 하였다” 또는 “류성룡이 김덕령을 구명하지 않고 방치하였다”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몇몇 신료는 ‘살인을 많이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고 애석할 일도 없다.’라고 밝혔다. 심지어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죽여도 괜찮으니 후환을 없애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덕령은 무고로 희생된 자이다. 그를 죽인 자는 선조일까? 류성룡을 비롯한 신료들일까? 《선조실록》에서는 선조의 의지가 강해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신료의 태도가 선조보다 더 심했다고 말한다.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은 1596년 8월 21일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이는 그의 죽음에 대하여 억울한 죽음 또는 무고한 죽음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마땅한 전공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김덕령은 ‘술주정이 심하고 성질이 고약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할 수 없다. 그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