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김덕령의 무고한 죽음

수필 임진왜란 제6부

by 수필가 고병균

역사학자들은 김덕령의 죽음에 대하여 무고(誣告)한 죽음이라고 말한다. 무고(誣告)란 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고발하거나 고소하는 것이다. 김덕령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범죄 사실을 지적한 자는 아무도 없다. 이런 김덕령을 선조는 기어이 죽였다. 그 사연은 무엇일까?


1596년(선조 29년) 8월 4일, 선조는 김덕령을 국문했다. 그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아뢰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조는 그를 사가(私家) 한 칸에 따로 가두게 했다. 그 이후 21일까지 무려 6회에 걸쳐 친국했다. 친국(親鞠·親鞫)은 왕이 친히 죄인을 심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가(私家)란 감옥에서 독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8월 8일, 김덕령의 심복 최담령을 친국한다. 최담령은 처자를 만나려고 전라도 부안으로 갔다 잡혀 왔다. 14일에 최강·김언욱 등 참모들도 추국하여 신속 처리했다.


김덕령에 대해서는 16일에 2차 친국, 18일에 3차 친국, 19일에 4차 친국, 20일에 5차 친국이 이어졌다.

선조는 친국을 진행하는 중에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반응은 둘로 나뉜다.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使) 정탁(鄭琢)과 김응남(金應南)은 김덕령을 두둔한다. ‘증거 없음’을 들어 ‘반역하지 않았다.’라고 여러 차례 구명했다. ‘김덕령의 이름이 반란군의 공초(供招)에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요청하였고, 김덕령 구명을 위한 상소문 〈김덕령옥사계〉(金德齡獄事啓)도 지어 올렸다.

김덕령 자신도 죄가 없음을 거듭 주장했다.

“비록 도적들의 한 말이 그와 같을지라도 공모했다면 반드시 오고 간 자취가 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저에게 터무니없는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저 역적 무리가 국가에서 저를 쓰지 못하게 하려고 시기하여 모함하는 흉계를 부린 것입니다. 제가 우러러 받드는 군부의 앞에서 분변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발명(發明)하겠습니까?”


“이 뒤에 만일 어떠한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긴다면 김덕령과 같이 용맹한 자를 놓아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일 수 있을는지는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의정 류성룡의 대답이다. 죄가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고 ‘이 뒤에’ ‘만일’ ‘어떠한 일이 생긴다면’ 등 이상한 논리로 응답했다.

8월 21일, 6차 친국에서는 수차례 고문을 받아 목숨만 겨우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김덕령의 죄명은 밝혀내지 못했다.

선조가 또 물었다. 누군가가 구명해 주기 바라며 물었다. 성경 이야기에서 ‘예수냐? 바라바냐? 선택하라.’는 빌라도의 물음과 같다. 그러나 응답하는 신료는 없었다.


역사 기록에도 ‘김덕령을 엄하게 처벌하라.’라고 주장한다. 그 사례를 살펴본다.

《선조실록》에는 김덕령에 관하여 류성룡이 아뢴 기록이 있다.

“역적들의 공초에 많이 나온 자가 김덕령이어서 마땅히 추문(推問)해야 합니다. 김덕령은 송유진(宋儒眞) 때도 역적들의 공초에 자주 나왔었으나, 그때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현(韓絢)의 초사(招辭) 속에 나왔으니, 이는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 김덕령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지만, 죄명은 없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동인, 서인을 막론하고 신료들이 ‘엄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한다.

동인 류성룡은 ‘김덕령에게 죄가 있음이 확실하니 다른 죄인이 다다를 때까지 치죄를 신중히 따져야 한다.’고 간하면서 놓아주는 일에 반대했다. 여기서도 죄명은 없다.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도 ‘즉시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죄명은 없다.

1668년(현종 9년) 이후 김덕령의 죽음을 거론한 기록이 있지만, 죄명은 없다.

선조 : 치대(置對)함에 미쳐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없다.

성룡 : 이치상 반드시 살려둘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살게 둘 수는 없다.

어떤 역사학자는 김덕령 1차 옥사 때와 달리 말하는 류성룡을 비난하고 있다.

“류성룡이 김덕령을 죽이게 하였다” “류성룡이 김덕령을 구명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 :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죽여도 괜찮으니 후환을 없애야 한다. ‘장수 하나쯤 죽여도 괜찮다.’, ‘국가가 차츰 편안해진다’ 참 어처구니없다.

몇몇 신료 : 살인을 많이 했으니 죽어 마땅하고 애석할 일도 없다.

이상 기록에서 보듯 1596년 8월 21일, 김덕령은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드러난 죄명은 없었다. 당연히 이몽학의 난과도 상관없는 일이다.


역사학자가 말한 것처럼 김덕령의 죽음은 분명 무고한 죽음이다. 그를 죽인 자는 과연 누구일까? 《선조실록》에서는 ‘선조의 의지가 강해서’라 하며 선조를 지명한다. 반면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신료들의 태도가 선조보다 더 심했다.’라 하며 신료들을 지명한다. 그러니까 김덕령을 죽인 자는 조선의 왕 선조요, 신료들이다.

김덕령의 죽음에 대하여 ‘마땅한 전공이 없다.’ ‘술주정이 심하고 성질이 고약하여 사람 죽이기 좋아했다.’ 이렇게 말하는 학자도 있다. 이 말대로라면 김덕령을 죽인 자는 다름 아닌 김덕령 자신이다.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마땅한 전공이 없다.’는 김덕령에게 해주고 싶은 성경 말씀이 있다. 송유진의 난 이후 숙청당한 이산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言)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能力)에 있음이라.” (고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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