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원균의 출정

수필 임진왜란 제7부

by 수필가 고병균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네 차례의 해전을 지휘했다. 기문포 해전, 가덕도 해전, 서생포 해전, 그리고 칠천량 해전이 그것이다. 이들 해전은 원균이 지휘한 해전이라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칠천량 해전을 제외한 세 차례의 해전에 대하여 살펴본다.


원균의 1차 출정은 기문포 해전이다. 1597년 3월 9일(4월 24일), 당시 거제도의 기문포(器門浦)에는 왜선 3척에 왜병 20여 명이 정박해 있었다. 이때 원균이 항왜를 통해 ‘술을 주겠다.’며 초청했다. 휴전기였기에 왜병들은 경계하지 않았으며, 기꺼이 응해 술을 받아 돌아간다. 그런데 원균이 저들의 뒤통수에 대고 지자총통을 쏘았다. 독기가 오른 왜선 3척이 달려들어 판옥선 1척을 빼앗아갔다. 조선군이 추격하여 왜병 수급 18명을 베었으나, 우리 판옥선이 침몰당하고, 조선 수군은 140명이나 죽었다.

그런데 원균은 도원수 권율과 짜고 정박한 왜병의 수를 20명이 아닌 80명으로, 수급의 수는 18명이 아닌 47명으로 뻥튀기한 장계를 올렸다. 그 진상을 김응서가 비변사에 알렸다. 그러나 선조의 반응은 없다.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의 행적이 의심스럽다.


원균의 2차 출정은 가덕도 해전이다. 1597년의 출정 일지를 날짜별로 정리한다.

* 3월 29일(5월 14일)에 원균의 장계가 올라왔다.
‘4월에서 5월 사이 덕포와 안골포, 죽도, 부산의 왜군,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만약 육군이 몰아낸다면 수군이 대를 쪼개듯 쉽게 섬멸할 수 있다.’
수군이 해야 할 임무를 자기는 하지 않고 원균은 육군더러 선제적으로 공격하라고 한다.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라는 심보 아닌가? 참 어처구니가 없다.

* 4월 30일(6월 1일),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덕도에 주둔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측 기록에 따르면 ‘4월에 일본 병선 수천 척이 대마도에서 부산을 향하고 있을 때, 조선 수군 수백 척이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진격해서 가로막고자 했다. 이때 큰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났고, 조선 수군이 결국 거제도로 되돌아갔다.’라고 했다.

* 5월 초 도도 다카도라가 부산에 도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통해 6~7월에 호남진격설을 흘렸다. 원래 목표는 6월이었으나, 실제로는 준비 부족으로 7월 보름부터 일본군이 움직였다.

* 5월 8일(6월 22일), 조선 조정에 도원수 권율의 보고가 올라왔다.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 때문에 조선 수군이 고단한 것은 원균의 주장과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의 내용이었다. 이상 현실은 원균의 장계와 전혀 다르다.

* 5월 12일(6월 26일), 권율은 조선 수군에 의한 공격을 강조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는 수군의 선제공격으로 육군의 선제공격을 제안한 원균의 전략과 정반대였다. 이를 두고 비변사가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 수군을 3등분하여 절영도까지 오가며 강습 타격하라는 것이었다. 전투를 수행하는데 일일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비변사는 전투 수행 방법까지 제시해야 할까? 원균의 하는 짓이 참으로 안타깝다.

* 6월 10일(6월 28일), 도체찰사로 나가 있는 우의정 이원익이 또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수군을 2등분하여 절반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키고, 절반을 이끌고 부산포 쪽을 강습하라는 전략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병력 5천 명까지 지원하며 압박했다.

* 6월 18일(7월 31일), 원균은 함대 100여 척을 모두 이끌고 2차 출정에 나섰다.

* 6월 19일(8월 1일), 안골포(오늘날 부산 신항)에 이르러 적에게 포격하면서 적선 두 척을 빼앗았다. 오후, 조선 수군이 가덕도 방면으로 나아가자 안골포를 구원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다카하시 무네마스 등 일본 수군과 정면 대결을 펼쳤다. 이로써 평산포 만호 김축은 눈부상을 당했고, 보성군수 안흥국은 전사했다. 병사 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했던 이순신과는 그 전황이 전혀 다르다.


원균의 3차 출정은 서생포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도 원균의 작전은 없다.

* 6월 26일(8월 2일), 비변사는 수군을 원균의 본대, 배설의 경상우도 부대, 이억기의 전라우도 부대, 최호의 충청도 부대 등 넷으로 나누어, 한산도-견내량을 지키면서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서로 관측-교대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 7월 4일(8월 16일), 원균은 함대 100여 척을 이끌고 3차 출정에 나섰다. 원균은 ‘부산으로의 해로를 차단하라.’는 권율의 명령을 미이행했으면서 두모포(부산 기장군 죽성리)에서 5척, 서생포(울산 울주군 서생면)에서 7척이 전멸당하는 등 판옥선 20척과 정병 3천을 잃었다. 이는 군법으로 다스려야 할 사안이다.

* 7월 11일(8월 23일),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곤양(현 사천시)으로 불러 곤장을 쳤다. 이날 밤, 원균은 한산도의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이상 기문포 해전, 가덕도 해전, 서생포 해전 등 원균이 수행한 세 차례의 해전은 정상적인 작전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 등이 전략을 조언했다. 비변사도 조언했다. 그러나 원균은 어느 작전도 따르지 않고, 무턱대고 함선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많은 수군과 함선을 잃었다. 그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휘관이었다.

선조가 원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10] 김덕령의 무고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