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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이순신의 마지막 바다, 노량해협

수필 임진왜란 제10부

by 수필가 고병균

우리는 광주박물관 주차장에서 출발했다. 남해와 통영의 1박 2일 관광이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던 백 선생이 국도로 빠져나오더니 ‘저기가 남해대교입니다.’라고는 차량을 세웠다. 남해대교의 장관을 구경했다. 한쪽에 ‘남해대교’란 제목의 안내판이 있다. 그중에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이를 잇는 대교’란 굴귀가 눈에 확 띈다. 군인 출신 백 선에게 물었다.

“백 선생님, 저 다리 아래 바다가 노량해협인가요?”

“네~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바로 그 바다입니다”

순간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리고 치열했을 당시의 전투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노량해전은 퇴각하는 일본군과 그것을 막으려는 조명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우선 조선 수군은 병사가 6,000 ~ 7,000명이다, 전함은 판옥선 60척이고, 그것을 호위하는 협선과 방패선은 80~180척이다. 바로 직전, ‘왜교성 전투에 투입된 수군이 7,328명’, 정유재란이 끝난 후 나대용 장군이 보고한 ‘삼도의 판옥선 60척’이 근거이다.

명 수군은 병사가 15,000 ~ 18,000명이다. 전함은 명의 사선과 호선이 300여 척이다. 그러나 소형이어서 전함으로 사용할 만한 배가 못 된다. 이런 까닭에 명의 장수 진린과 등자룡은 참전하기를 꺼렸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이 두 장수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면서 판옥선 2척을 선사했다. 당시 상황의 절박함과 이순신 장군의 진심이 느껴진다.

한편 일본 수군은 병사가 약 23,000명이다. 시마즈의 병사 15,000명과 타치바나의 병사 5,000명, 기타 병사가 2,500명이고 나머지 500명은 군역장과 순왜, 조선인 포로 등이다. 전함은 안택선과 세키부네를 합하여 최소 350척이다. 180명이나 승선하는 대형 함선인 안택선에는 다이묘와 같은 장수들이 승선하고, 이보다 작지만 빠른 세키부네에는 일반 병사들이 승선한다. 승선 인원을 평균 100명이라면 병사의 숫자는 더 많아진다.

이상 두 진영의 병력이 5만이요, 전함도 무려 1천 척이 넘는 대규모 해전이다.


전투는 치열했다. 그날 새벽 4시부터 시작된 전투가 무려 8시간 이어졌다. 그날 낮 12시쯤 전투는 끝났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나라별로 피해 규모를 비교한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 150~300명, 전선 피해 0~4척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명나라의 기록에는 전선의 피해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시마즈 가문의 기록에 ‘4척 격침’이라 했다. 전사자 중에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있다.

명 수군의 피해는 전사자 200~350명이고, 전선 손실가 1~2척이다. 전사자 중 명의 장수 등자룡이 있고, 손실 전함 중에 등자룡이 승선한 판옥선도 있다.

일본 수군의 피해는 사상자은 13,000명, 참전 병사의 절반이 된다. 전선 피해는 침몰 200척이다. 일본의 《정한위략(征韓偉略)》에 ‘일본 대장선조차 분멸되었으며, …… 200척 완파’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 수군의 일부는 탈출했다. 순천 왜교성의 주둔군 70척은 참전하지 않은 채 탈출하고, 사천의 구원군은 겨우 50~60척만 탈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시마즈 요시히로, 가도 기요마사까지 일본 장수들은 모조리 살아서 돌아갔다.


노량해전이 끝났다. 7년간 끌어온 전쟁도 끝났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는다.

제1차 금산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던 중 일본을 향하여 ‘가문의 원수요, 나라의 원수’라고 외쳤다. 그리고 스스로 복수장군이 되어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전사했다.

이순신 역시 저들을 순순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라, 적이여! 나의 마지막 바다로!’ 하며 벼르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원수를 갚아야 한다.


이후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이 원수를 갚으려 했을까? 아니다. 오로자 당파싸움으로 날을 지새웠다. 그렇게 300여 년이 지난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다. 조선 백성은 일본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지긋지긋한 세월이 35년이다.

천만다행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1948년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렇지만, 당파싸움(?)은 여전했다. 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거지 나라가 되었다.

이후로도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간혹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원수를 갚으려는 숭고한 뜻은 없었다. 순전히 당파싸움(?)의 명분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인지라 원수를 갚는 일이 불가능했다. 남해대교를 건넌 그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대한민국이 일본을 넘어섰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대한민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빈곤의 상징이었던 보릿고개를 극복했다. 6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폭증했다. 1997년에는 무려 160배인 11,000달러를 달성하였고, 2024년에는 36,194달러를 달성하여 일본의 35,793달러를 능가했다. 드디어 갚았다. 무력이 아니라 경제력으로 원수를 갚았다.

K-방산은 더욱 놀랍다. 육군의 K-2 전차와 K-9 자주포, 공군의 KF-21 전투기 등은 일본을 넘어 아예 국제 방산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급 잠수함, 다산 정약용함, 세종대왕함 등 해군 함정이 한반도 주변 해역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저들에게 원수를 갚고 있다. 그 주인공은 경제를 발전시킨 산업의 역군들이고, 방산 무기를 개발한 국방 과학자들이다. 복수의병장 고종후가 갚지 못한 원수를 산업의 역군들이 갚고, 이순신 장군도 미처 갚지 못한 원수를 국방 과학자들이 갚고 있다. 정말 자랑스럽다. 산업 역군들이 자랑스럽고, 국방 과학자들이 자랑스럽다. 이들이야말로 민족의 영웅이다.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원수를 갚은 대한민국의 애국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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