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8부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충신이다. 해전에서 23전 23승의 뛰어난 전적을 남긴 충신이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그중 하나로 이순신에게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다고 말한다. 수많은 참모 중에서 정운, 정걸, 나대용, 송희립 등 4명을 거명한다. 이들이 어떤 활약을 펼쳤을까?
정운(鄭運)은 1543년 9월 10일(10월 7일) 전라도 영암군 옥천면 (現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1545년에 태어난 이순신보다 2년 상이다.
정운은 1591년 녹도 만호(鹿島萬戶)가 되었고, 이순신(李舜臣)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라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해 왔다. 이순신(李舜臣)은 그의 요청에 따르기로 결의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흘이나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에게 출정을 종용한 장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운이다. 자신의 군관 송희립과 함께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군관은 무과를 거치지 않는 무관으로 오늘날 하급 장교 또는 하사관에 해당되는 참모를 말한다.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적의 예봉을 꺾어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정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정했다. 정운은 옥포(玉浦) 해전에 출전한 왜선 30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랐고, 당포(唐浦) 한산도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매사에 과유불급이다. 그해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적의 대포에 맞아 전사했다.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라 하며 목 놓아 울었고 그의 영전에 제문을 지어 올렸다. 정운은 머뭇거리는 이순신에게 출정을 독려한 충신이었다.
정걸(丁傑)은 1514년 전라도 흥양현(지금의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순신보다 31년 상이다.
정걸은 1577년(선조 10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여 직책상 이순신보다 14년 선배이다. 당시 47세였던 이순신은 78세 고령의 정걸을 조방장으로 불렀다. 조방장은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이다. 경험이 많은 선배를 불러 쓴 이순신, 그에게서 지혜로움과 겸손이 돋보인다. 그것을 증명하듯 난중일기에 정걸과 나눈 대화 장면이 29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정걸은 부산포 해전에서 무작정 싸우려는 정운을 극구 만류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걸은 이순신을 도와 위기의 조선을 구한 충신이었다.
나대용(羅大用)은 1556년 전라도 나주목 거평면 오륜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순신보다 11년 후배다.
나대용은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이순신(李舜臣)을 만나러 여수로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이순신도 그가 선박 전문가라는 것을 알아보고, 막하에서 군관으로 일하게 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나대용은 거북선을 개발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판옥선의 갑판 위에 지붕을 덮고 거기에 쇠못을 박았다. 왜군이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옆면은 두꺼운 나무로 막고 그사이에 총통을 설치했다. 우리 수군을 보호하면서 적의 함선을 향해 포를 발사할 수 있는 구조이다. 그 거북선은 사천 해전에 투입되어 왜군 함선 13척을 격파하였다.
나대용은 해전에도 참전했다. 자신이 개발한 거북선이 최초로 투입된 사천 해전에서 총탄에 맞았다. 나대용도 이순신과 함께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충신이었다.
송희립(宋希立)은 1553년 전라도 흥양현 대강면(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태어났다. 이순신보다 8년 후배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고 1591년에 이순신의 직속 군관이 되었다. 송희립은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었을 때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정경달 정탁 황대중 등과 함께 대궐 문 앞에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무죄를 주장했다.
이순신이 복직한 후 다시 그 휘하가 되어 명량해전에 참전했으며, 노량해전을 앞두고는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묻는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한 바 있다.
“화친에 응한다 해도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이 분명하며 넓은 바다에서 싸워야 합니다.”
이순신은 ‘넓은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는 송희립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최후 해전 장소로 노량 앞바다를 선택했다. 거기서 왜 수군을 박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적의 총탄에 맞았다. 이때 송희립은 이순신을 대신하여 북을 두드리며 전투를 독려했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작전을 보좌한 충신이었다.
이상 네 사람은 모두 전라도 출신이다. 해남 출신 정운은 이억기를 기다리며 머뭇거리는 이순신에게 출정할 것을 강청하고, 옥포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참모였고, 고흥 출신 정걸은 자기보다 31세나 어린 이순신의 조방장으로 전술과 전략을 조언했던 참모였으며, 나주 출신 나대용은 거북선과 판옥선 등을 건조한 참모였고, 고흥 출신 송희립은 이순신의 지근거리에서 그림자처럼 도운 참모였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이후 곳곳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에서 이순신을 도운 충신들이었다. 23전 23승의 놀라운 전적을 이루도록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었다. 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들은 진정 ‘이순신의 승전 비밀’이었다.
아, 충신 이순신 주변에는 충신들이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