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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8-9] 이순신의 승전 비밀

수필 임진왜란

이순신은 옥포 해전을 비롯하여 사천 해전, 한산도 해전, 부산 해전, 웅포 해전, 당항포 해전, 장문포 해전, 명량대첩, 절이도 해전, 왜교성 해전, 노량 해전에 이르기까지 백전백승이라고 말한다. 그 승전 비밀은 무엇일까? 어떤 학자는 정운, 정걸, 나대용, 송희립 등 이순신의 참모 네 명이 승전의 비밀이었다고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 보여준 이들의 활약상을 들여다본다.     


정운(鄭運)은 1543년 10월 7일(음력 9월 10일) 전라도 영암군 옥천면 (現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1545년에 태어난 이순신보다 2년 연상이다. 


정운은 1591년 녹도 만호(鹿島萬戶)가 되었고, 이순신(李舜臣)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라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해 왔다. 이순신(李舜臣)은 그의 요청에 따르기로 결의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이나 기다려도 이억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이순신 앞에서 출전을 종용한 장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운이다. 군관 송희립과 함께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습니다. 적의 예봉을 꺾어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습니다. ”


이순신은 정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전했다. 옥포(玉浦) 해전에 정운은 왜선 30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랐고, 당포(唐浦) 한산도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매사에 과유불급이다. 그해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은 적의 대포에 맞아 전했다.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라 하며 목 놓아 울었고 그의 영전에 제문을 지어 올렸다.     


정걸(丁傑,)은 1514년 전라도 흥양현(지금의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순신보다 31년 상이다. 당시 78세 고령의 정걸을 이순신은 조방장으로 불렀다. 조방장은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이다. 그런데 정걸은 1577년(선조 10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바 있는 14년 선배이다. 


이순신에게는 정걸과 같이 경험이 많은 선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정걸과 나눈 대화가 29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이순신의 겸손함과 훌륭함을 느끼게 한다.

정걸은 부산포 해전에서 싸우려 하는 정운 장군을 극구 만류했다는 일화도 있다.     


나대용은 1556년 전라도 나주목 거평면 오륜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태어났다. 

나대용은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이순신(李舜臣)을 만나려고 여수로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라, 이순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이순신을 찾아간 것이 신통하다.


이순신도 그가 선박 전문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막하에서 군관으로 일하게 했다. 나대용은 거북선을 개발하는 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했었는데, 판옥선의 갑판 위에 지붕을 덮고 거기에 쇠못을 박았다. 이는 일본 수군이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옆면을 두꺼운 나무로 막고 그사이에 총통을 설치했다. 우리 수군을 보호하면서 적의 함선을 향해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구조였다. 거북선이 주요 해전에 투입되어 크게 공헌한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나대용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투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사천 해전에서 탄환에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송희립은 1553년 전라도 흥양현 대강면 마륜리(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고 1591년에 이순신의 직속 군관이 되었다. 송희립은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었을 때, 정경달 정탁 황대중 등과 함께 대궐 문 앞에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이순신이 복직한 후 다시 그 휘하가 되어 명량 해전에 참전하였다. 노량 해전을 앞두고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송희립은 답은 이랬다.

“명군과 조선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을 가해야 합니다.‘

“화친에 응한다 해도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이 분명하며 넓은 바다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 '넓은 바다'가 바로 노량 앞바다였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았다. 그때 송희립은 이순신의 복장을 하고 북을 두드리며 전투를 독려했다. 

송희립은 이순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군관이었다.     

학자들은 말한다. 이순신이 해상 전투에서 승리한 비밀은  정운, 정걸, 나대용, 송희립 등 네 명의 참모였다고 …….


우리말에 ‘끼리끼리’란 말이 있다.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 주변에는 동류의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말이다. 그 원리에 따라 나라에 충성하는 이순신 주변에는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 정운과 정걸, 나대용과 송희립 등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었고, 이순신의 승전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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