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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9-2] 의인 김대인의 죽음

수필 임진왜란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노량 해전도 끝났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도 막을 내렸다. 그런데 ‘정유재란의 후속처리’에 관한 어떤 분의 글을 읽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연합 수군의 본부가 묘도의 도독에 있었다고 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묘도는 여수시 묘도동에 있는 섬으로 ‘고양이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여수와 묘도를 잇는 묘도대교와 묘도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대교가 건설되어 쉽게 왕래한다. 


묘도의 도독골은 진린이 노량 해전을 총지휘했던 사령부였고, 군장 항구는 묘도 수군 사령부 도독에 군수물자와 수병을 실어 나르던 군항이었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장기적인 전투를 대비하기 위하여 많은 병기와 식량을 쌓아두었는데 그곳이 적량이다. 


당시 적량에는 7만 병사가 3개월 동안 먹을 군량미를 쌓아두었다. 적량의 창고가 좁아서 영취산 밑에 저장소를 지어 상적이라 하였고 원래의 저장소는 하적이라 했다. 하적은 주로 군량미 저장소였고, 상적은 군 병기 저장 및 수리 제작소였다. 그리고 묘도는 수군 도독의 본부였다.

 그러니까 노량대첩은 노량해협에서 벌어졌지만, 진린이 전투를 총지휘했던 곳은 묘도 도독인데, 그것을 알게 하는 역사 기록이 없다.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598년 12월 정유재란이 끝나고 이듬해 봄, 명나라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수군은 군장에서 여수 고흥 진도 등의 바다로 떠나갔고, 육군은 순천 방향으로 떠났다. 철군은 꼭 한 달이 걸렸는데 그들이 떠난 뒤에 하적에는 수만 석의 군량미가 남아 있었다. 


이것을 여수가 낳은 전쟁 영웅 김대인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전라 좌수사 이유직이 전후처리 과정에서 사욕을 챙겼다. 이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는데 그 대화가 아주 적나라하다. 


김대인 장수가 이유직 수사에게 따졌다.

“전후 수습할 수사가 국가의 재산인 군량미를 빼돌린단 말이오?”

“입 닥치지 못할까? 네놈이 뭘 안다고 잔소릴 하느냐?”

“난 이순신 장군을 따라 노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수요. 간섭할만하니까 하는 소리오.”

“뭐라고? 넌 지금 상관에게 대드는 거야. 뭘 믿고 까부느냐? 너를 비호할 이순신은 죽었다. 그리고 네놈은 등과도 못 한 채 수훈으로 장수가 된 인물이니 엄격히 말하자면 장수가 아니고 공훈도 없다는 것을 알아라.”

“말 삼가시오. 비록 등과는 못 했지만, 난 권율 원수와 이순신 장군이 인정하고 임명한 장수이며 조선의 장수로 최후의 전투 노량 해전의 승리한 자요.”

“다 끝난 전과다. 지금 난 너의 상관이다.”

“두고 봅시다. 곧 공훈이 내려지면 난 수사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것이요. 비리를 본 이상 난 가만있지 않을 것이요.”

“네가 나를 고발한다고? 그건 하극상이다.”     


이유직(李惟直)[1552~?]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의주 행재소까지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일등훈 절충계관(扈聖一等勳 折衝階官) 북병마절도사(北兵馬節度使)를 지냈고, 삭령 군수, 경흥 부사, 영원 군수 등을 지냈다. 1606년(선조 39) 간성 군수로 재직할 때 암행어사 박안현(朴顔賢)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아 파직당했다. 그 내용은 형장(刑杖)이 가혹하고 명령을 자주 바꾸어 혼란을 일으켰으며, 훈련 시 교관의 말만 듣고 군사를 움직여 민심을 크게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관직에 올라 광해군 때 충청병마절도사, 전라좌수사를 지내는 등 무신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서산 출신 전주 이 씨 가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김대인은 이유직의 비리를 조정에 상소했다. 그러나 류성룡의 비호로 사면되었다. 그러자 반대로 이유직이 김대인을 고발했다. 고발의 이유는 ‘어명에 불만을 품고 명을 받들지 않고 임지에 안 갔다.’라는 것이다. 김대인은 임지에 가 있었다. 그렇지만 의금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김대인은 이유직의 비리를 끝까지 주장했으나, 매를 맞았고 끝내 죽었다. 김대인의 죽음과 함께 선조가 다스리는 조선의 공정성도 함께 죽었다.


역사에서는 류성룡을 ‘정직한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군량미 사건에서 이유직과 김대인을 대하는 그의 행태는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이유직은 자신의 비리를 묻기 위해서 군장과 적량의 유적을 없애버렸다고 하면서 이분은 다음 사항을 주장한다. 

“이제라도 묘도의 도독부와 군장과 적량의 역사 유적을 되살려야 한다.”

“사료를 찾아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와 함께 나라의 공정성도 살려내야 한다. 의인 김대인에게는 상을 주고, 탐관오리 이유직에게는 벌을 내리는 그런 나라로 복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공의가 강같이 흐르는 공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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