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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여수가 낳은 의인, 김대인

수필 임진왜란 제9부

by 수필가 고병균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노량해전도 끝났다. 7년이나 끌어온 지긋지긋한 전쟁도 막을 내렸다. 그런데 ‘정유재란의 후속 처리’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 글에 의하면 ‘연합 수군의 본부가 묘도의 도독에 있었다.’라고 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묘도는 ‘고양이섬’이라 불리는 여수시 묘도동에 있는 섬이다. 지금은 여수와 묘도를 잇는 묘도대교, 묘도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대교가 건설되어 쉽게 왕래한다.


묘도의 도독골에는 명의 제독 진린이 노량해전을 지휘했던 총사령부가 있었다. 거기에는 군수물자와 수병을 실어 나르던 군항인 군장 항구가 있었으며, 장기적인 전투에 대비하여 조명연합군의 병기와 식량을 많이 쌓아두었던 적량도 있었다.


당시 적량에는 7만 병사가 3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군량미를 쌓아두었다. 적량의 창고가 좁아서 영취산 밑에 저장소를 지어 상적이라 하였고 원래의 저장소는 하적이라 했다. 하적은 주로 군량미 저장소였고, 상적은 군 병기 저장 및 수리 제작소였다. 그리고 묘도는 수군 도독의 본부였다.

그러니까 노량해전 당시 전투는 노량해협에서 벌어졌지만, 진린이 전투를 지휘했던 곳은 묘도 도독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기록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598년 12월 정유재란이 끝나고 이듬해 봄, 명나라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수군은 군장에서 여수 고흥 진도 등의 바다로 떠나갔고, 육군은 순천 방향으로 떠났다. 철군은 꼭 한 달 걸렸다. 그들이 떠난 뒤, 하적에는 수만 석의 군량미가 남아 있었다.

이것을 여수가 낳은 전쟁 영웅 김대인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전라 좌수사 이유직이 전후처리 과정에서 사욕을 챙겼다. 이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는데 그 대화가 아주 적나라하다.


대인 “전후 수습할 수사가 국가의 재산인 군량미를 빼돌린단 말이오?”

유직 “입 닥치지 못할까? 네놈이 뭘 안다고 잔소릴 하느냐?”

대인 “난 이순신 장군을 따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수요. 간섭할만하니까 하는 소리오.”

유직 “뭐라고? 넌 지금 상관에게 대드는 거야. 뭘 믿고 까부느냐? 너를 비호할 이순신은 죽었다. 그리고 네놈은 등과도 못 한 채 수훈으로 장수가 된 인물이니 엄격히 말하자면 장수가 아니고 공훈도 없다는 것을 알아라.”

대인 “말 삼가시오. 비록 등과는 못 했지만, 난 권율 원수와 이순신 장군이 인정하고 임명한 장수이며, 조선의 장수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승리한 자요.”

유직 “다 끝난 전과다. 지금 난 너의 상관이다.”

대인 “두고 봅시다. 곧 공훈이 내려지면 난 수사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것이요. 비리를 본 이상 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유직 “네가 나를 고발한다고? 그건 하극상이다.”


이유직(李惟直)[1552~?]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의주 행재소까지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일등훈 절충계관(扈聖一等勳 折衝階官) 북병마절도사(北兵馬節度使)를 지냈고, 삭령 군수, 경흥 부사, 영원 군수 등을 지냈다. 1606년(선조 39) 간성 군수로 재직할 때 암행어사 박안현(朴顔賢)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아 파직당했다. 그 내용은 형장(刑杖)이 가혹하고 명령을 자주 바꾸어 혼란을 일으켰으며, 훈련 시 교관의 말만 듣고 군사를 움직여 민심을 크게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관직에 올라 광해군 때 충청 병마절도사, 전라 좌수사를 지내는 등 무신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서산 출신 전주 이 씨 가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김대인이 이유직을 조정에 상소했다. 그러나 영의정 류성룡의 비호로 사면되었다.

이번에는 이유직이 김대인을 고발했다. 고발 사유는 ‘어명에 불만을 품고 명을 받들지 않고 임지에 안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인은 임지에 가 있었다. 그렇지만 의금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매를 맞아 끝내 죽었다.

이후 이유직은 군장과 적량의 유적을 모두 없애버렸다.

영의정 류성룡을 역사에서는 ‘정직한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그의 행적을 보면 그럴 것 같지 않다. 그의 공정성에 의심이 간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면서 다음 사항을 주장한다.

“이제라도 묘도의 도독부, 군장과 적량의 역사 유적을 되살려야 한다.”

“사료를 찾아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하나를 덧붙인다. 역사 유적지를 되살리는 것과 함께 나라의 공정성도 살려야 한다.

공정성이란 한 마디로 상 받을 자에게 상을 주고, 벌 받을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다. 그 공정성은 시대와 상관없이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이 원칙대로라면 군량미를 지키려 했던 자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개인의 사용을 채우려 했던 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400년이 더 지났지만, 이제라도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군량미를 지키려 했던 의인 김대인의 죽음에 보답하는 길이요, 공정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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