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8부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 중 수로군의 작전은 어떠했을까? 수로군의 지휘관은 명의 진린이다. 조선의 이순신이 아니다. 이 자가 지휘하는 수로군의 작전이 성공할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수로군의 공격 목표는 순천 왜교성이다. 거기에는 외교에 능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왜군 1만 5천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특이하게도 수륙 합동 작전하다. 명의 제독 유정이 지휘하는 서로군이 육지에서 공격하고, 명의 제독 진린이 지휘하는 수로군이 바다에서 공격하는 합동 작전이다.
약속한 대로 수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1598년 9월 20일(10월 19일) 1차 공격, 21일 2차 공격, 22일 3차 공격, 10월 3일 4차 공격, 4일 5차 공격, 5일 6차 공격 등 줄기차게 공격했다. 그렇지만 유정이 지휘하는 육로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11월 13일(12월 10일) 조선 수군은 왜군의 군량미 창고가 있는 장도를 공격했다. 장도는 순천만 가운데 있는 섬이다. 이순신은 군사를 상륙시켜 군량미를 빼앗아 오게 했다. 배에 실을 만큼 빼앗고 나머지는 불태우게 했다.
진린이 지휘하는 명의 수군도 장도 섬 가까이 진격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장도 주변은 수심이 얕다. 대형 군선이 기동하기에 불리하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서 섬 가까이 접근해 있던 명의 전선 39척이 갯벌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왜군이 총공격을 가해 왔다. 지형지물을 파악하지 못한 진린의 무모한 작전이었다.
이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어떤 문책을 받게 될지 모른다. 이순신은 판옥선 7척을 갯벌에 댔다. 그 판옥선도 갯벌에 걸렸다. 그러나 판옥선은 높다. 활을 물론 대포를 쏘아도 닿지 않는다. 판옥선은 다음 밀물 때 빠져나왔다. 이게 장도 해전이다.
이로써 수로군의 작전도 실패로 끝났다. 수륙 합동 작전을 펼쳤던 순천 왜교성 전투는 육군의 협조가 없어서 실패했고, 수로군이 단독으로 펼친 장도 해전은 진린의 무리한 작전으로 별 소득 없이 끝났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왜군의 피해는 전선 30척이 격침되었고, 11척이 나포되었으며, 전사자도 3,000명에 이른다. 명군의 피해는 전선 39척이 침몰당하고, 수군 2,300명이 전사했다. 조선 수군도 피해가 컸다.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과 군관 이청일(李淸一)이 전사하고, 휘하 장병도 130명이나 전사했다. 이 피해는 순전히 명의 수군을 구하려다 입은 피해이다.
학자들은 장도 해전을 노량해전의 전초전이라고 말한다. 이순신도 7년을 끌어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라, 적이여! 나의 마지막 바다로’ 하며 노량해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기사를 소개한다.
社稷威靈(사직위경) 粗立薄效(조립박효)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寵榮超躐(총영초렵) 有踰涯分(유유애분)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身居將閫(신거장곤) 功無補於涓埃(공무보어연애)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口誦敎書(구송교서) 面有慚於軍旅(면유참어군여)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겸손(謙遜)의 미덕이 철저하게 몸에 밴 사람이요, 진정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이후 3년이 지났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다. 1598년 음력 11월,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고민하고 있다.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파란만장한 전투 장면이 그림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옥포 해전을 비롯하여 한산 대첩 등 자신이 수행했던 해전이 생각났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전선을 누빈 장수들도 생각났을 것이다.
택도 아닌 이유로 자신을 탄핵했던 원균이 생각났을 것이다. 자신을 향하여 ‘역적’이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문무백관이 생각나고, 자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추천했으면서도 ‘공은 공, 사는 사’라고 하며 ‘죽이라.’고 했던 친구 영의정 류성룡도 생각났을 것이다. ‘경상도에서 이순신만 한 장수는 없다.’, 자신을 인정해 주고, ‘전시에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해임하지 못하옵니다.’ 하며 법과 원칙을 지켜 판결한 소신파 재상 오리 이원익도 생각났을 것이다, 전쟁을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는 피난민들도 생각났을 것이다. 이불과 물항아리까지 내주며 응원했던 해남 백성들의 하소연도 귀에 들렸을 것이다.
백의종군할 때는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도 생각나고, 임종조차 하지 못한 불효함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면이 왜군에게 살해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노량해전이 끝나면 자신의 공을 인정해 줄까? 선조가 받아줄까? 이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것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삘릴리~’ 하는 피리 소리가 들린다. 명의 군사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는 일성호가(一聲胡笳)이다. 그 소리가 울돌목의 거센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이순신의 마음을 싸늘하게 만든다. 그 마음에 싸늘한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