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9부
임진왜란의 영웅을 말할 때, ‘한산도대첩의 이순신’, ‘진주대첩의 김시민’, ‘행주대첩의 권율’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곽재우에 대해서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라 말할 뿐, ‘정암진 전투의 곽재우’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에서 ‘홍의’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이다. ‘철릭’이란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큰 소매가 달린 옷이다. 빨간색의 홍철릭과 파란색의 청철릭이 있다. 곽재우가 입은 철락은 그의 아버지 곽월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붉은 색깔의 비단으로 지은 옷이다. <난중잡록>에 ‘홍의장군(紅衣將軍)’은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했다.’라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란 뜻이다.
홍의장군 곽재우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정암진 전투와 함께 소개한다. 의성 출신 의병장 신흘이 남긴 <난적휘찬(亂蹟彙撰)>의 기록이다.
전라 순검사라고 칭하는 왜적이 ‘정암진을 건너야겠다.’라는 격문을 돌렸는데, 이르기를 ‘맞이하는 자는 안전하고, 항거하는 자는 죽으리라.’라고 씌어 있었다. 이에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 꾸짖기를 ‘감히 말하노니, 적을 맞이하는 자는 죽으리라.’ 하고, ‘천자께서 네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사실을 들으시고 미리 홍의장군을 보내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중에 습격하도록 하셨노라.’ 하는 내용의 격서를 적에게 보냈다.
곽재우는 즉시 실천에 옮겼다. 한 사람에게 붉은 옷을 입혀 산 위에서 내달리게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같은 색깔의 옷을 입혀 말을 타고 산 위로 치달리도록 하여, 서로 바라보이는 땅을 달리게 하였더니 능히 산골짜기를 날아 넘는 듯했다. 저쪽에서 사라지면 이쪽에서 나타나고, 이쪽에서 사라지면 저쪽에서 나타나는 왕래 동작이 깜짝할 사이인지라, 왜적이 이상하게 여기다가 마침내 흩어져 강을 건너지 못했다.
<기재사초> 임진일록 4권에도 의병장 곽재우와 정암진 전투를 언급했다.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 사람으로 승지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을 업으로 하였는데, 적이 의령 근처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회유하여 이르기를, ‘적이 이미 육박해 왔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가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 젊은 나이로 싸울 만한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만일 마음을 같이하여 정진(鼎津)을 근거지로 삼아 지키면 마을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호응하였다. ‘정진(鼎津)’이란 ‘정암진’을 말한다.
곽재우는 나룻가 언덕 위에 군대를 매복하게 하고, 호각 부는 자를 많이 구해서 붉은 옷을 입히고 산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였다. 이들을 사면에 벌여 두고, 적이 이르면 일제히 호각 소리를 내게 하고, 언덕 뒤의 복병은 활을 마구 쏘기도 했다. 적은 이것을 보고 놀라 흩어졌다. 적의 수급 백여 급을 베었다. 이후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정만록>에서도 정암진 전투 함께 홍의장군의 이야기가 나온다.
곽재우는 장사 10여 명을 뽑아 자신과 똑같이 붉은 옷을 입히고 백마를 태워 매복시킨 다음 스스로 미끼가 되어 왜군을 유인했다. 10여 리쯤 왜군을 유인한 뒤 화살로 신호를 보내자 곽재우와 같은 복장을 한 장사 10여 명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숲에서 강노를 쏘아 왜군을 공격했다.
왜군은 강기슭으로 달아났는데 이는 곽재우가 의도한 것이다. 곽재우는 물이 잔잔한 곳에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는데, 그 장애물에 막힌 왜군을 급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홍의장군의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었지만, 정암진 전투에서 왜군이 도하 지점을 골라 꽂아놓은 푯말의 위치를 바꿔 늪으로 유인했다는 내용은 없다.
정암진 전투에서 곽재우의 병력은 의병만 50명, 이에 반해 왜군 안코쿠지 에케이의 병력은 선봉이 2,000명, 그런데 전투 결과는 ‘곽재우 의병이 승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망자가 얼마이고, 부상자가 얼마인지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여기서 곽재우가 전투에서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심리전이나 기만전술을 펼친 까닭을 알 수 있다. 그 심리전이 기만전술이 매우 치밀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 전술이 조금이라도 허술했다면 ‘적들이 놀라 물러갔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게 뻔하다.
그리고 전투 결과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이는 곽재우가 장계 올리는 일에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곽재우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592년 10월, 진주대첩에 원군으로 참여했을 때도 곽재우는 같은 작전을 펼쳤다.
곽재우는 직접 교전하지 않고 심리전을 펼쳤다. 심대승에게 명하여 산에 올라 횃불을 밝히고 포성을 울리며 ‘전라 의병 1만과 홍의장군이 내일 도착해 왜군과 싸울 것’이라 소리치게 했다. 홍의장군 곽재우만이 펼칠 수 있는 전술이다.
이상을 의병장 곽재우는 지피지기의 전술을 펼칠 줄 아는 지휘관이었고, 적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도 승리로 이끌 줄 아는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장계 올리는 일에 소홀하여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점이 아쉽다. 그 결과 ‘정암진 전투의 곽재우’가 아니라 ‘홍의장군 곽재우’라 불리게 된 점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