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난 해는 1598년이다. 그 이후로 곽재우는 18년을 더 살았다. 그동안 곽재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의 삶에 대하여 알아본다.
임진왜란의 빛나는 전공으로 곽재우에게 벼슬이 내려졌다. 1599년 2월 진주 목사, 9월에 경상 좌병사에 임명되었다. 영남 지역의 군무를 총괄하는 위치다.
벼슬길에 오른 곽재우가 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그래서 왕에게 장계롤 올렸다. 1599년 12월 장계를 올려 영남 방어 대책을 건의했다. 핵심 내용은 산성을 거점으로 한 방어였다. 1600년 2월에 또 장계를 올렸다. 당대 정치와 군정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내용이었다.
전후 복구 사업에 매진해야 할 시점에 조정의 신하들은 붕당을 나누어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기만 한다. 국내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화의가 필요함에도 화의를 반대하고 사신을 구금해 일본을 자극하는 외교적 미숙함도 보였다. 이원익 같은 경륜을 갖춘 명신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정승직에서 몰아냈다. 수군만 중시하고 육군을 등한시해 산성 수축과 방어 체계 수립에 소홀했다.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 낸 곽재우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는 일본과 화의를 주장한 것이 문제였다. 그때나 오늘날이나 일본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낙향해 버린 일이다.
관료들은 곽재우를 당장 체포해 추국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선조는 심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추된 권위를 만회하려는 듯 크게 분노했다.
즉시 형벌이 논의되었다. 의금부에선 ‘대명률에 따라 장 100대에 변방으로 보낸 군역을 지게 한다는 조항이 있음’을 보고했다. 선조는 그 정도론 안 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곽재우가 받은 형벌은 선조실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선생 문집’에 수록된 연보(年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02년에 풀려났다.’
유배 이후 곽재우는 도교의 수행 방법인 벽곡찬송을 실천했다. 벽곡(辟穀)이란 곡식은 먹지 않고 솔잎·대추·밤 등을 조금씩 먹음. 또는 그런 삶을 말한다.
1600년 6월과 1601년 3월 다시 곽재우를 서용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반대했다. 공신책봉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공신도감에서 경상 우도를 보전한 공을 들어 곽재우를 공신으로 책봉하자고 건의했다. 조선군의 공적 자체를 폄하하고 의병은 아예 없었던 사람 취급해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고 곽재우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던지 공신도감 1603년 4월 공신에 책봉될 만한 장수 26명을 선발해 보고할 때 곽재우의 이름을 넣었다. 그것도 제외되어 곽재우는 선무공신에는 들지 못했다. 완전 토사구팽(兔死狗烹)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고 2년이 지난 1604년 곽재우는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찰리사에 임명되어 도원수 지휘하에 경상도 지역의 방어와 군사 훈련 등의 군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때도 변함없이 산성의 수축과 그 관리에 집중했다. 찰리사[察理使]란 군무로 지방에 파견하는 임시 벼슬이다.
선조실록 1604년 4월 14일 그가 올린 장계의 내용은 ‘안동의 천생 산성은 그 형세가 험난한 곳으로 전에 이시언이 수축공사를 시작하여 대강 수선을 마쳐 놓았으므로, 자신이 직접 가서 형세를 살펴보고 미진한 부분을 보수하여 수축을 마무리 짓겠다.’라고 밝혔다. 곽재우의 관심사는 경상 지역의 산성을 쌓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곱지 않게 본 대북의 비방을 받아 1년을 채우지 않고 낙향해 벽곡을 하며 지냈다.
곽재우의 벽곡에 대해서 조정의 비판이 일었다. 1607년 5월 4일 사헌부에서 ‘벽곡은 도가의 방술로써 유교적 교화에 장애가 되니, 곽재우를 서용하지 말고 선비 중에 벽곡을 따라 하는 자를 적발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자.’고 하며 곽재우를 탄핵했다. 자기편이 아니면 그가 무엇을 하건 밉다.
이런 상황인데 곽재우가 광해군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또 했다.
“고명 7신은 죽어 마땅하다. 선왕께서 영창대군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도 그자들은 결국 대군을 못 지켰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이로써 곽재우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 선조에게 곽재우와 갚은 전쟁영응은 소모품에 불과한가? 이런 조선에 대하여 희망이 없다.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 등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삶을 살았다. 그의 말년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군주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물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말조심해야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은 다.’는 속담의 교훈을 곽재우에게서 배운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