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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곽재우의 파란만장한 인생

수필 임진왜란 제9부

by 수필가 고병균

곽재우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했다. 임진왜란 이전의 곽재우는 소문난 갑부였고, 과거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선조의 마음을 거스른 답안이 문제였다. 임진왜란 중 곽재우는 신출귀몰하는 작전을 펼쳐서 전공이 빛나는 의병장이었다. 전쟁이 끝난 1598년 이후 곽재우는 19년을 더 살았다. 그가 1617년 65세로 생을 마감했을 때 남긴 것은 거문고와 작은 낚싯배 한 척뿐이었다. 곽재우 말년의 삶이 궁금하다.


전쟁이 끝난 이후 선조는 전공이 빛나는 곽재우에게 벼슬을 내렸다. 당연한 일이다.

1599년(선조 30년 47세) 방어사에 임명되었다. 계모의 상중이었던 그는 사퇴하였다. 동년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도 계모의 상중이었던 탓에 1개월 지체하여 10월에 부임했다. 몇몇 대산들은 이것을 탄핵의 사유로 삼았다.

1600년(선조 33년, 48세) 2월 일본과 화친을 할 것을 건의했다. 이것은 화약고에 불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했다. 곽재우는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는 귀향했다. 이것 역시 탄핵의 사유가 되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읽어본다.

“곤수는 이미 중임을 받아 병권을 전제(專制)하고 있으니 임의로 버리고 가서는 안 됩니다. 국법이 매우 엄할뿐더러 신하의 의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상 좌수사 곽재우는 적을 토벌해야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화친을 통하기를 주장하면서 심지어 정백(鄭伯)이 어깨를 드러내고 양을 몰았다는 일까지 인용, 이를 문서에 드러내어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그리고는 소장을 올리자마자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교만하고 패려한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추국하여 율(律)에 의거 죄를 정하소서.

선조실록 122권, 선조 33년(1600 2월 29일(계묘) 1번째 기사

“사간원에서 경상 좌수사 곽재우를 추국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곽재우는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2년이 지난 1602년(50세)에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도교의 수행 방법인 벽곡 찬송을 실천했다. 벽곡(辟穀)은 ‘곡식은 먹지 않고 솔잎·대추·밤 등을 조금씩 먹음. 또는 그런 삶’이다. 그러는 한편 곽재우는 영산현 남쪽 창녕 창암진 솥바위나루 낙동강변에 망우정을 짓고 시문 등으로 소일했다.


1604년(선조 37년, 52세) 곽재우는 선조로부터 출사 요청을 받았다.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했다가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 줄 모른다. 그는 찰리사가 되었다.

찰리사(察理使)는, 조선시대 3품에 해당하는 관리가 군무(軍務)로 지방에 파견될 때 제수하던 군직이다. 전시에 주로 임명되었으며, 정1품 도체찰사, 종1품 체찰사, 정2품 도순찰사, 종2품 순찰사 등과 같이 파견된 지역의 군권과 행정권을 총괄하였다. 찰리사를 역임한 대표적인 관료로 1601년(선조 34년) 곽재우(郭再祐)와 1787년(정조 11년) 원주에 파견된 이시수(李時秀) 등이 있다.

찰리사 곽재우는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건의하였다. 그해 5월 선산 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직에서 사직하였다. 이어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였다. 이런 그가 대신들의 눈에는 아니꼽다.

1604년 8월 행(行)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 10월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고, 11월 승자(陞者)하여 가선대부 행용양위 상호군에 제수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행(行) 인동 현감(仁同縣監)’에서 ‘행(行)’이 붙은 직책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명예직으로 여겨진다.

1605년(53세) 2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동년 3월 한성부 우윤이 되었고, 5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한성부 ‘우윤’은 서울 부시장 정도로 이해된다.

1607년(선조 40년, 55세) 3월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해 말,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여러 번 받았으나, 그 이유 중에는 음식을 끊고 도술과 수련에 전념한다는 점도 있었다. 왕이 듣지 않았다.


곽재우의 관심사는 오로지 산성 쌓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곱지 않게 본 대신들이 있었다. 그들의 비방을 받아 찰리사마저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낙향했다. 그리고 벽곡을 하며 지냈다. 그 벽곡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 해 5월 4일, 사헌부에서 ‘벽곡은 도가의 방술로써 유교적 교화에 장애가 되니, 곽재우를 서용하지 말고 선비 중에 벽곡을 따라 하는 자를 적발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자.’고 탄핵했다. 곽재우의 일거수일투족은 탄핵의 사유가 되었다.


광해군도 곽재우를 불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56세)에 곽재우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다시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돌아왔다.

1609년(광해군 1년, 57세) 관직에서 물러났다.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불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곽재우는 장계를 올렸다. 그것은 광해군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고명신은 죽어 마땅하다. 선왕께서 ‘영창대군을 지키라.’ 명령을 내리셨는데 그자들은 결국 대군을 못 지켰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곽재우의 삶은 정의로웠다. 그러나 과격한 말이나 행동은 왕과 대신들의 마음에 얻지 못했다. 도리어 탄핵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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