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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Jul 03. 2022

[11-1] 선조의 아들 감싸기

수필. 임진왜란

임진왜란 이후에도 임해군의 방종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1602년 7월 4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국혼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전 주부 소충한을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간원에서는 ‘왕자가 대낮에 거리낌 없이 살인했으니 국가의 법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하면서 ‘마땅히 법에 따라 조사하여 벌하라.’고 간했다. 하지만 선조는 들은 체 만 체 자신의 혼인에 대한 문제만을 처결했다.


일반 백성이 대낮에 사람을 때려죽였다면 참부대시형에 처한다. 참부대시형이란? 『대명률』에 규정하고 있는 5형(五刑) 체제에서 가장 중한 형벌이 사형(死刑)이다. 사형의 정형(正刑)에는 교형(絞刑)과 참형(斬刑)이 있는데, 교형은 죄수(罪囚)의 목을 졸라서 죽이는 것이고 참형은 목을 베는 것이다.


참형(慘刑)은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참대시(斬待時)·참부대시(斬不待時)로 구분된다. 여기서 ‘시(時)’는 추분(秋分)을 가리킨다. 사람의 목숨을 끊는 사형은 자연 질서에 반하는 것이기에 사형의 집행은 자연 질서가 쇠퇴하는 추분(秋分)부터 춘분(春分) 사이에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니, 동양 고래(古來)의 법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형의 집행은 시기를 기다려서 하는 참대시(斬待時)가 원칙이었으나, 10악(十惡) 및 강도(强盜)와 같은 중죄인의 경우에는 재판이 확정된 후에 즉시 집행했다. 이것을 참부대시(斬不待時)라고 한다.


조선후기의 법전에는 참부대시를 적용하는 죄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속대전』에는 모역(謀逆)이라고 무고(誣告)한 경우·군복(軍服)을 입고서 관청 문에서 변(變)을 일으킨 경우·처(妻)의 상전(上典)을 살해한 경우·사족부녀(士族婦女)를 겁탈한 경우·궁녀(宮女)가 외부인과 간통한 경우·읍민(邑民)이 관장(官長)에게 발포(發砲)한 경우·사전(私錢)을 주조한 경우 등 7가지인데 『대전통편』에는 거짓으로 봉화(烽火)를 올린 자를 포함하고 있다. 부대시에서도 임신한 여성의 경우는 예외로 하여 출산을 기다렸다가 집행한다.      


임해군의 범죄행각은 계속 자행되었다. 수시로 백성들을 구타하고 노비를 빼앗았으며, 종을 시켜 여염집을 부수고 들어가 닭이나 돼지를 약탈했다. 세간의 원성이 자자했다. 심지어 왕실과 국가, 관료의 재산까지도 탐했다. 지방에서 서울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강탈하고, 지방 수령이 서울에 올라오면 수행원들을 붙잡아둔 다음 협박하여 재물을 갈취했다. 날강도 같은 짓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해 8월 23일 선조는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려 임해군에게 물건을 빼앗긴 사람들을 조사하여 각자 주인에게 돌려주고, 성천의 기녀 역시 현지로 돌려보내고, 행패를 부린 임해군의 노비를 적발하여 엄벌에 처했다. 그러자 도성 안의 백성들이 기뻐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임해군에게는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순빈 김씨 소생 순화군의 행각은 더 가관이었다. 그는 평민과 노비들을 마구 죽였다. 억울한 희생자가 해마다 10여 명에 달했다. 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빈전(廬幕)의 여막에서 어미를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겁탈했다. 여막(廬幕)은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을 말한다.


이런 극악무도한 죄상에는 왕족이라도 사형에 처해야 마땅했다. 종부시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수차례 처벌을 간청했다. 선조는 그 아들 때문에 남몰래 마음을 졸이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중벌을 내리지 않고 유배형으로 대신했다.


유배지 수원에서도 그는 관원과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평민 윤화의 아내 맹무녀의 생니를 부러뜨려 죽게 했다. 그 일로 인하여 순화군은 가택연금의 처벌을 받았으며, 1607년 28세의 나이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중풍(中風)이란 뇌일혈로 이하여 몸 일부가 마비되는 병으로 50대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질병이다. 순화군에게는 그것이 20대에 나타났다.           



선조의 이런 행위를 역사학자들은 ‘아들 감싸기’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을 감싼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임해군과 순화군에 대한 선조의 감싸기는 도를 넘었다. 아버지가 왕이라 해도 그들의 죄를 마냥 감쌀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심판을 받는다. 각각 선악에 따라 심판을 받되, 그 몸으로 행한 것이 심판의 기준이다. 왕자의 몸으로 태어난 임해군과 순화군이라도 그 심판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까닭에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임해군과 순화군을 비난한다. 그들의 아버지 선조를 비난한다.      

해인사의 삼층 석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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