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진리의 엄격함을 증명한 신각

수필. 임진왜란 제1부

by 수필가 고병균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했다. 특히 용인 전투에서는 조선군 10만 대군이 일본군 1,600명에게 대패했다. 조선군은 흩어지고 찢기어 지리멸렬(支離滅裂) 그 자체였다.

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둔 영웅들이 나타났다. 누구일까? 1592년 5월 16일 해유령 전투의 신각, 5월 24일 정암진 전투의 곽재우, 7월 8일 이치 전투와 1593년 2월 12일 행주대첩의 권율, 1592년 7월 10일 우척현 전투의 김면과 정인홍, 8월 1일 청주성 탈환 전투의 조헌과 양규, 8월 28일 이후 연안 전투의 이정암, 9월 16일 이후 함경도 지방을 평정한 북관대첩의 정문부, 10월 6일 진주대첩의 김시민 등이다. 이들은 육상 전투에서 승리한 영웅이요, 조선인만을 이끌고 나가 승리한 영웅이었다. 그런데 선조는 엉뚱하게도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자 신각을 죽였다. 왜 그랬을까?


5월 18일 김명원의 장계가 올라왔다. ‘신각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로 도망쳤다.’라는 내용이었다. 비변사에서는 ‘군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라고 청했고, 파천 길에 오른 선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처형하라.’라고 명했다.

얼마 후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선조는 부랴부랴 선전관을 보내며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형을 집행한 자는 우의정 유홍이다. 당사자에게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성급하게 처리했다.

그 결과 선조는 유능한 장수 신각을 잃었다. 그리고 유능한 신하 김명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선조는 악수(惡手)를 두고 만 것이다.


신각은 부원수 자격으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황을 살핀 그는 ‘물러나서 군사를 재정비하자.’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김명원은 그의 건의를 듣지 않았고, 작전은 실패했다.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이건 사회 구조의 잘못이다. 전투에서조차 문관이 우대받는 사회 구조 그 자체가 잘못이다.

부원수 신각은 양주로 후퇴한 뒤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 그러던 중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70명을 만나 그들을 참살했다. 소규모였지만 조선군이 얻은 귀중한 승리였다. 해유령은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이다.


도원수 김명원은 자기의 종사관인 부원수 신각이 이양원을 따라간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장계를 올릴 당시 김명원은 신각이 올린 전과를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김명원을 유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도원수라는 직책에 충실했고, 전시 행정가로 성실하고 유능했으며,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잘못 판단하여 신각을 죽게 했다고 말한다. 이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한다.

1597년 정유년,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 작정했을 때, 김명원은 이순신의 구명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고, 천만다행으로 이순신은 재기용되었다.

김명원은 신각과 이순신을 바꾼 꼴이 되었다.


당시의 통신수단으로 가장 빠른 것이 봉화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 시간은 아주 빠르면 2시간, 늦으면 12시간 정도 걸린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런 봉화를 통해 사태를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일본군은 조선이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미친 속도로 진격해 왔다.


당시의 상황을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임진왜란 초기 패주하는 일선 장수들이 속출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강경론이 제기되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신각이 재수 없이 걸려들었다.’라고 말한다.

재수의 있고 없음은 마음대로 못 하지만 사람들은 재수 있기를 추구한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선거철만 되면 정화수 떠 놓고 두 손을 비볐다. 재수 있으라고 그랬다.

그런데 재수 좋은 것 이전에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소소하고 작은 규정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빈틈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각은 두 가지의 전시 규정을 어겼다. 그 하나는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물러난 신각은 도원수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갔다. 부원수로서 도원수를 수행하는 임무에 소홀한 것이다. 이게 바로 도원수 김명원이 장계를 올린 이유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즉시 보고하라.’라는 규정도 어겼다. 신각은 해유령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지 장계를 곧바로 올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웃고 눈감아 줄 만큼 아주 미미한 사안이다.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신각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빛나는 전공(戰功)마저도 땅속에 묻히게 했다.


안타까운 이 사건에서 평범한 진리의 엄격함을 깨닫는다. 그 진리란 전투에서 공(功)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소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 진리의 엄중함을 신각은 죽음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이 그 진리의 소중함을 깨달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것 같지 않다. 그 사건에 대하여 반성하는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왕 역시 ‘후회한다’는 말도 없었다. 다만, 장계를 올린 김명원만 선조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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