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니탕개(尼湯介)의 난(1)

수필 임진왜란 제3부

by 수필가 고병균

니탕개(尼湯介)의 난은 1583년(선조 16년) 1월부터 7월에 걸쳐 함경도 북부 지역의 6진에서 벌어진 여진족의 변란을 일컫는다. 임진왜란 9년 전의 일이다.

여기서 6진은 세종 당시 김종서가 개척한 종성(鐘城), 온성(穩城), 회령(會寧),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 등의 성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여진족과 마주하고 있다.

조선은 6진을 방위함에 있어서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김종서가 집필한 제승방략에 따르면 6진에는 봉수대가 82개소, 수호처(순찰지)가 94곳, 육상의 고정 관측 지점인 후망이 2곳, 해상의 고정 관측 지점인 해망이 11곳 등 그 방위 체계가 매우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 그만큼 방어 의지가 강경하였음을 뜻한다.

방위 체계가 아무리 잘 짜여 있어도 그것을 담당한 지휘관이 무능하면 의미가 없다.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니탕개 난이다.


니탕개 난은 1차 전역과 2차 전역으로 구분한다.

1차 전역은 1583년 1월 28일(2월 20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원진에 소속된 아산보에서 시작된 난으로 경원진 전역이라 한다. 이때 여진족의 우두머리는 니탕개가 아니고 우을지(迃乙知)였다. 이순신에게 사로잡힌 우을기내(于乙其乃)와 동일인이다.

당시 만주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 여진족은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조선을 침입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이 여진족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것이 여진족을 화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1월 28일, 우을지(迃乙知)가 여진족 1만여 명을 이끌고 경원진에 속한 아산보를 공격했다. 경원 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가 구원에 나섰으나 패하면서 경원성으로 철수했다. 김수(金璲)와 양사의(梁士毅)는 방위 구역을 정하고 방어전에 들어갔는데, 서문을 맡았던 전 만호 이봉수가 달아났다. 그래도 김수(金璲)와 양사의(梁士毅)는 끝까지 저항하여 무기고와 식량 창고를 지킬 수 있었다.

다음날, 여진족은 재차 공세를 가했다. 조선군은 무기고를 지키려고 전날보다 더 거세게 반격했다. 그때 온성 부사 신립이 합세했다. 여진은 슬그머니 물러났다.

2월 9일, 여진족이 훈융진을 공격해왔다. 훈융진도 경원부 소속의 진포이다. 두만강의 돌출된 부위를 내려다보며 제어하기에 좋은 감제(瞰制) 지점이다. 반면 여진족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거점이었다. 감제(監製)는 ‘감독하여 제조함’이란 뜻인데 조금 어렵다.

훈융진은 조선이 구축한 총 23개의 진포 중 3번째로 큰 규모이고 자체 병력도 153명으로 5번째로 많았지만, 성의 사면을 포위하고 충교(衝橋)를 만들어 가며 공격하는 만 명이 넘는 적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그때 황자파(黃柘坡)에서 주둔 중이던 온성 부사 신립과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의 구원하러 왔다. 그러자 여진은 산맥을 타고 후퇴했다. 신립은 훈융진으로 가던 중 공격받고 있던 안원보도 구출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충교(衝橋)란 무엇일까? 다리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의미가 궁금하다.

신립의 용맹이 대단하다. ‘신립이 온다.’라는 말만 들어도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인지 꽁무니를 뺐다. 두 번이나 그랬다.


여진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함경도 일대는 전란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졌다. 겁을 먹은 지휘관도 나타났다. 북도우후(北道虞候) 이인길(李仁吉)은 숨어다니고, 길주 목사 이난수는 군대조차 내지 못했다.


경원진을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간 전황은 조선의 번호들에게 큰 반향이 일어났었다. 특히 종성과 회령 일대의 번호들이 여진에 가담하여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번호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중국 청나라 때, 이민족(異民族)의 호적(戶籍)을 이르던 번호(番戶)이고, 둘째는 조선에서 북방 변경의 오랑캐를 이르는 번호(藩胡)이다. ‘호’의 한자가 다르다. 여진에 가담한 번호(藩胡)로 명간노(明看老)가 유명한데 그는 회령(會寧)에 거주한 인물이었다.


조선에서는 분위기의 반전이 필요했다.

함경 북병사 이제신의 지휘 아래 보복 공격을 감행했다. 제1 선발대는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 제2 선발대는 부령 부사(富寧府使) 장의현(張義賢)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제3 선발대는 군관(軍官) 김우추(金遇秋)·이종인(李宗仁)·김준민(金俊民) 등이다.

2월 16일, 이들은 세 길로 나누어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저들의 본거지를 불태웠다. 신립과 변국간은 금득탄(金得灘)·안두리(安豆里)·자중도(者中島)의 450여 굴을 불태우고, 신상절과 원희는 마전오(麻田塢)를 불태웠으며, 김우추, 장의현, 이종인, 유중영, 권홍 등은 상가암(尙加巖)·우을기(于乙其)·거여읍(車汝邑)·포다통(浦多通)·개동(介洞) 등 80여 굴을 불태웠다. 이로써 전투는 일시적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당시 무관의 상당수는 겁을 먹고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여진족에게 가담하는 번호들아 나타났다. 그것이 들불처럼 번졌다. 온성 부사 신립이 활약하고, 함경 북방사 이제신의 지휘 아래 여진족을 대대적으로 토벌한 후에야 진정되었다.

김시민은 지방관들의 이런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진정한 평화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군대 개혁을 병조에 요청했을 것이다. 김시민의 그 생각이 거룩하고 그 용기가 가상하다. 이는 400여 년이 훨씬 지나서 내린 나의 판단이요,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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