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니탕개(尼湯介)의 난(2)

수필. 임진왜란 제3부

by 수필가 고병균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1583년 2월 26일, 조선의 조정에서는 다소 엉뚱한 지시가 내려졌다. ‘김수(金璲)와 양사의(梁士毅)를 처형하라.’는 지시였다. 반면 겁을 먹고 도망친 만호 이봉수, 숨어다닌 북도우후(北道虞候) 이인길(李仁吉), 군대조차 내지 못한 길주 목사 이난수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북방사 이제신은 그 지시를 집행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3일이나 미루었다.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임에도 힘을 다해서 경원진의 무기고와 식량 창고를 지켜낸 김수(金璲)와 양사의(梁士毅)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제신은 파직되고 말았다.

선조의 이런 처분은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진에 가담한 번호가 더 많아진 것이다. 그 여파로 제2차 전역이 일어났다.


2차 전역은 1583년 5월 5일부터 7월 19일까지 벌어진 종성진 전역이다.

5월 5일(6월 24일), 여진의 수장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가 2천여 기병을 앞세우고 두만강을 건너 종성진을 공격했다.

니탕개는 당시 여진 세력 중 가장 강성했었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였다가 다시 여진족으로 돌아간 인물로, 함경북도 일대의 지리적 상황과 방어 체계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사실상 여진족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조선은 여진족의 도하를 저지하려 시도했다. 그렇지만 전력의 열세로 출신군관(出身軍官) 권덕례(權德禮)와 최호(崔浩)가 전사하고, 토병(土兵)도 다수 피살되었으며 병사(兵使)도 포위되었다.

종성진은 6진 중에서 최북단의 진영이다. 종성진이 뚫리면 여진은 곧바로 함경 평야까지 진출할 수 있다. 이에 조선은 화포를 쏘아대며 저항했다. 여타 진영의 구원군이 올 때까지 수비에 전념하였다. 이때 ‘효정’이라는 여진족 세력이 니탕개의 본거지를 불태웠다. ‘효정’은 니탕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진족으로 조선에게는 은인이다.

5월 13일(7월 2일), 니탕개가 또 공격해 왔다. 1천여 명의 기병을 앞세우고 종성진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5월 16일에 5천 명의 여진족을 이끌고 동관진과 방원보를 동시에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5월 19일에는 무려 2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동관진 한 곳만을 집중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여진족 ‘투을지’가 그 사실을 조선에 밀고하여 실패했다.


니탕개는 조선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심지어 항복하겠다는 제안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것을 거부했다. 니탕개를 잡아 죽여야 했다.

니탕개는 또 공세를 가했다. 7월 19일(9월 4일)에 2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방원보를 공격했다. 방원보는 성 전체가 강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주변 진영의 구원이 없었음에도 여진족은 방원보를 함락하지 못했다.

니탕개는 공격을 멈추었고, 얼마 후 조선의 신립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하여 니탕개의 난은 끝났다. 그때가 1583년, 임진왜란 9년 전의 일이다.


여진에 가담했던 조선의 번호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조선은 두만강 유역의 번호에 대하여 회유책과 함께 반항하는 세력을 응징하며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는 중에도 세력이 강력한 번호가 나타났다. 특히 누르하치와 결탁한 노토(老土)는 육진의 번호를 공격하였다.

조선의 토병을 살해한 명간노에 대해서 감정이 지극히 나빴다. 선조실록에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번호가 명간노를 체포하여 항복해 오면 회령의 보을하진(甫乙下鎭)에서 납관(納款)을 허락하겠다고 밝혔다.」

- 《선조실록》 33년 1월 26일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나름대로 풀이해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을하진(甫乙下鎭)’은 진이다. ‘종성진’과 같은 지명이라기보다 기능을 말하는 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납관(納款)’의 사전적인 뜻은 ① 온 마음을 다하여 복종함. ② 정의(情誼)를 통함이다.

실록을 다시 정리한다.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다.

‘명간노를 체포하여 항복해 오는 번호에는 회령의 보을하진(甫乙下鎭)에서 조선을 지키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하여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그것을 허락하겠다.’

「1602년(선조 35) 6월에 비변사에서 명간노 등을 회령으로 잡아 보내 그 죄목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형장(刑杖)을 치자고 주장할 정도로 이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였다.」

- 《선조실록》 35년 6월 16일

「명간노의 아들 등이 조선의 관할 하에 있던 고령(高嶺)의 독소부락(篤所部落) 등을 공격하며 조선을 괴롭혔다.」

- 《선조실록》 35년 7월 10일

사람의 심리는 참 묘하다. 회령 지역에 살던 번호 명간노(明看老)는 조선인이면서 조선군에 가담하지 않았고, 반대로 ‘효정’이나 ‘투을지’는 여진족이면서 여진족 수장 니탕개 세력에 가담하지 않았다.

김시민은 함경도의 이런 민심을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이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군대 개혁을 주장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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