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녹둔도 전투

수필. 임진왜란 제3부

by 수필가 고병균

녹둔도 전투는 1587년과 1588년에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김시민은 한반도의 가장 북쪽 변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군대 개혁을 주장했는지 모른다.


1587년 가을에 풍년이 들었다.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던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은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가을걷이를 하고 있었다. 둔전(屯田)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둔병의 군량을 자급하기 위하여 마련된 밭이고, 다른 하나는 각 궁이나 관아에 딸린 밭이다. 이 둔전은 녹둔도에 주둔한 병사들의 군량을 조달할 목적으로 순찰사 정언신이 마련한 밭이다.

이때 추도(楸島)에 살고 있던 시전부족(時錢部族)의 여진족이 습격해 왔다. 그 결과 책루(柵壘)를 지키고 있던 수장(戍將) 오형(吳享)과 임경번(林景藩) 등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15필의 말도 약탈당했다. 이순신과 이경록이 저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적 3인을 베고 포로 60여 인을 빼앗아 왔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두만강의 퇴적 작용으로 러시아의 연해주 쪽으로 붙어버렸다.

세종대왕 시절부터 조선의 영토였던 녹둔도가 제2차 아편전쟁 이후 1860년에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이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갔다. 1989년, 북한은 녹둔도를 소련으로부터 반환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990년, 중국과 맺은 국경조약에 따라 북한은 녹둔도를 소련 땅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녹둔도에는 현재 러시아의 국경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다. 영토는 국가 성립의 3대 요소 중 하나이다. 400여 년 동안 우리의 영토였는데, 이런 식으로 빼앗겨서는 안 된다.

한편 압록강 하구에는 황금평이 있다. 이 땅도 퇴적 작용으로 중국 쪽에 붙었으나 철조망으로 국경을 형성하고 있어서 녹둔도와는 달리 지금도 북한 땅이다.

국토를 지키는 일은 곧 국가를 지키는 일이다. 국가 지도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다시 녹둔도 전투로 돌아간다. 1587년 9월 1일(10월 2일), 녹둔도를 관할(管轄)하는 함경도 경흥 부사(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은 제1차 여진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포로 160여 명을 구출하고 소수의 적을 죽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엄청나게 컸다. 그것을 북병사 이일(李鎰)은 ‘녹둔도함몰’이라 폄훼하면서 ‘이경록과 이순신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라고 조정에 건의했다. 이일은 왜 극형을 건의했을까? 어떤 학자는 시전부족(時錢部族)의 습격이 있었을 때, 도망친 자신의 죄과를 덮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조정에서는 이경록과 이순신에게 백의종군의 처벌을 내리고, 공을 세워 죄를 면할 수 있도록 선처했다.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은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으나, 조정에서는 여진의 빈번한 침입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588년 1월 14일(2월 10일), 북병사 이일은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 등 4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도(楸島)를 습격, 적 33명을 죽였다. 또 길주 이북의 여러 진병(鎭兵)과 중앙의 장수를 합세하여 2,500여 기(騎)의 군대로 여진 정벌에 나섰다. 회령 부사 변언수(邊彦琇), 은성 부사 양대수(楊大樹), 부령 부사 이지시(李之詩) 등이 선봉장이 되어 삼경(三更)에 두만강을 건넜다. 삼경(三更)이란 밤 11시부터 다음날 1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하늘에는 열나흗날의 둥근달이 두만강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날이 밝자 조선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여진 부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적 380명을 죽였으며, 말 9필, 소 20두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아군에서는 희생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이 전투를 ‘신전부락 전투’라고 한다. 이순신은 여진 추장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워 이경록과 함께 사면되었다. 이게 제2차 여진 정벌이다.

학자들은 제2차 정벌의 전과가 여진 정벌 역사상 가장 빛난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정벌에 참여했던 장수나 병사들은 임진왜란의 국난 극복에도 크게 공헌했다고 말한다.


녹둔도 전투와 관련하여 지도자급으로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부류는 여진 정벌에 앞장선 이경록이나 이순신과 같은 사람이다. 이경록은 1543년생으로 46세였고, 이순신은 1545년생으로 44세였다. 이 두 분은 임진왜란에서 남긴 업적이 크다. 이순신의 업적은 생략하나. 이경록은 1592년 6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의병을 도와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그 의병에게 갑옷과 병장기 등을 마련해주며 도움을 주었다. 당시 그의 활약상을 기록한 책 《매월당실기(梅月堂實記)》가 발간되었지만,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없다.

둘째 부류는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사의를 표명한 순찰사 정언신(鄭彦信)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1527년생으로 당시 62세의 고령이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에 사망했다.

셋째 부류는 모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북방사 이일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1538년생으로 당시 51세였다. 임진왜란에서 그가 남긴 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늘날 나라의 지도자는 국민의 투표로 선출한다. 어떤 인물을 선택해야 할까? 나는 첫째 부류의 인물을 추천한다. 이런 인물은 어디서 무엇을 하건 나라를 위해 선한 업적을 남긴다. 당시는 물론 나중에까지도 선한 업적을 남긴다. 아울러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동일시의 대상으로 첫째 부류인 이순신과 같은 인물, 이경록과 같은 인물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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