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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Jul 02. 2022

[3-7] 함경도의 지역감정

수필. 임진왜란

북관대첩은 1592년 음력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 등이 거병해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을 격파하고 순왜를 자처한 국경인 등을 참수한 전투를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순왜’(順倭)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으로 일본군에 협력한 자를 이르는 말이다. 역으로 조선에 부역한 일본인은 ‘항왜’라고 불린다.


순왜는 세 부류가 있다. 하나는 조선 조정에 불만이 있던 자들이 일본과 결탁하여 난에 가담한 경우, 둘째는 조선군의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등 왜군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경우, 마지막으로 왜군으로 전투를 나선 경우 등이다. 아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다가 굴복한 자들이다.      


(음 6월 1일),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2군이 함경도로 진입하면서 함경도 주민들에게 ‘무익한 저항은 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고했다.


동래성 전투에서 ‘싸우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 달라.’고 회유했던 일본군에 대하여 동래 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고 하며 죽음으로 저항했던 남쪽과 달리 함경도에서는 순왜가 많이 나타났다. 그 이유를 나는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이시애의 난에서 비롯되었다. 이시애 난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난이다.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 지방의 호족 토반(土班)이다. 경흥진병마절제사, 행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난을 일으켰다.


함길도는 함경도의 옛 이름으로 조선의 왕실 발상지이다.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지리적 특수 사정을 고려해 호족 중에서 인망 높은 자를 지방관으로 임명해 왔다. 그런데 왕권을 장악한 세조가 중앙집권 체제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줄이고 서울의 관리를 파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만이 쌓이는 중에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했다. 호패법은 호적을 정비하여 장정(壯丁)의 총수와 거처를 파악하여 부역을 균일하게 부과하고자 했던 제도이다. 이를 계기로 불만 세력을 규합한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다.


이후로 함경도 주민들은 조선 왕조에 대하여 반감이 강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해는 1467년이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1592년, 무려 125년이 지났건만 깊게 팬 지역감정의 골은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지도자는 물론 백성들까지도 지역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발언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둘째 이유는 함경도로 파견된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저지른 행패다. 그들은 주민들을 상대로 식량과 옷가지, 소 등을 자기들에게 소용되는 대로 약탈했다. 그 일로 주민들의 반감이 폭발할 지경인데 일본군이 쳐들어온 것이다.      


일본군에 대항하는 지방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방관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들마저도 순왜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잡혀서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함경도 남병사 이혼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함경감사 유영립도 달아났으나 백성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명천과 종성에서는 관가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거하고 관원들을 붙잡아 적에게 내주기도 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회령으로 도망쳤지만, 회령의 아전 국경인이 숙부 국세필과 함께 그들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겼다.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는 별다른 희생이 없이 함경도의 성과 마을을 점령해 갔다. 그 기간이 불과 한 달이다. 가토는 공이 많은 국경인을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로 삼았다. 그리고 국세필 등 다른 일당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 일본군의 기세가 등등했다.      


순왜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다. 사극 ‘정도전’에서 나온다.

왜구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따랐기에 정당하다고 외치는 백성이 있었다. 이 말을 듣고 정도전은 분개했다. 그래서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그래, 너는 잘못이 없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나라가 잘못이다’ 하며 눈물을 흘린다.      



함경도의 지역감정이 이런 지경에 이른 책임은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왕에게 있다. 그 주변에서 권력의 달콤한 꿀만 얻으려 한 대신들에게 있다. 따라서 책임을 물으려면 백성이 아닌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나라의 지도자는 어쩔 수 없이 순왜의 길로 들어선 함경도의 백성들을 위해서 정도전처럼 눈물을 흘려야 한다. 나라의 잘못이라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런 자가 진정한 지도자이다.

아파트 건물 사이로 보인 초 아흐렛날의 반달, 백성의 마음은 달처럼 수시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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