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3부
북관대첩은 1592년 음력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 등이 거병해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을 격파하고 순왜를 자처한 국경인 등을 참수한 전투를 말한다.
여기서 언급한 순왜란 세 부류가 있다. 하나는 조선 조정에 불만이 있던 자들이 일본과 결탁하여 난에 가담한 경우, 둘은 조선군의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등 왜군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경우, 마지막은 왜군으로 전투에 나선 경우 등이다. 아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다가 굴복한 자들이다.
1592년 6월 1일(7월 9일),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2군이 함경도로 진입하면서 주민들에게 ‘무익한 저항은 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고했다. 그 결과 순왜가 많이 나타났다.
‘싸우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 달라.’고 회유했던 일본군에 대하여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라고 하며 저항했던 동래 부사 송상현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이유를 나는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순왜가 많이 나타난 첫째 이유는 이시애의 난에서 비롯되었다. 이시애 난은 1467년에 일어났다.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하여 이시애가 일으킨 난이다.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 지방의 호족 토반(土班)이다. 경흥진 병마절제사, 행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1463년에는 회령 부사로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난을 일으켰다.
함길도는 함경도의 옛 이름으로 조선의 왕실 발상지이다.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지리적 특수 사정을 고려해 호족 중에서 인망 높은 자를 지방관으로 임명해 왔다. 그런데 왕권을 장악한 세조가 중앙집권 체제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줄이고 서울의 관리를 파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만이 쌓이는 중에 호적을 정비하는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했다. 장정(壯丁)의 총수와 거처를 파악하여 부역을 균일하게 부과하고자 했던 제도이다. 이를 계기로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후로 함경도 주민들은 조선왕조에 대하여 반감이 강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해는 1467년이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1592년이다. 그 사이 기간이 무려 125년이다.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났건만 깊게 팬 지역감정의 골은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나라의 지도자는 지역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일반 백성들도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순왜가 많이 나타난 둘째 이유는 함경도로 파견된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저지른 행패다. 그들은 주민들을 상대로 식량과 옷가지, 소 등을 자기들에게 소용되는 대로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그 일로 주민들의 반감이 폭발할 지경인데 일본군이 쳐들어온 것이다.
함경도 지방관 중에는 일본군에 대항하는 자도 있었다. 이들마저도 순왜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잡혀서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함경도 남병사 이혼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함경감사 유영립도 달아났으나 백성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명천과 종성에서는 관가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거하고 관원들을 붙잡아 적에게 내주기도 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회령으로 도망쳤지만, 회령의 아전 국경인이 그의 숙부 국세필 등과 합세하여 왕자들을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는 별다른 희생이 없이 함경도의 성과 마을을 점령해 갔다. 그 기간이 불과 한 달이다. 가토는 공이 많은 국경인을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로 삼았다. 그리고 국세필 등 다른 일당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 일본군의 기세가 등등했다.
순왜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다. 사극 ‘정도전’에서 나온다.
자신은 ‘왜구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따랐기에 정당하다.’고 외치는 순왜가 있었다. 이 말을 듣고 정도전은 분개했다. 그래서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그래, 너는 잘못이 없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나라가 잘못이다.”
드라마에 불과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는 조선의 대신을 나는 처음 본다.
함경도의 지역감정은 무엇인가? 함경도 지역의 지방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토호들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중앙정부 사이의 갈등이다.
이와 다른 성질의 갈등도 있다.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학부모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육지에 사는 어부 학부모와 섬에 사는 어부 학부모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상대의 어선을 향해 자기 배를 전속력으로 돌진한 일도 있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삶의 터전인 어장이었다.
또 다른 갈등도 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갈등도 있었다. 그 갈등의 원인은 교사의 교육권과 학생의 학습권 사이의 충돌이었다.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갈등도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업무 한계를 놓고 충돌한 갈등이다. 가장 무시무시한 갈등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갈등이고, 가장 악질적인 갈등은 정권을 놓고 벌이는 지역 간 갈등이다.
이런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할 자는 누구인가? 정치인이다.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은 그 갈등을 부추긴다. 그러면 갈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함경도의 지역감정으로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