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함경도를 회복하기 전에 정문부가 먼저 할 일은 국경인을 토벌하는 일이다. 그는 6진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수천의 의병들이 정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북계는 곧 회복될 것이며 왜적도 물러갈 것이다. 누구든 의기 있는 자는 역적 국경인의 목을 쳐 죄인의 굴레를 벗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
이 격문은 효과가 있었다. 회령의 유생 오윤적은 국경인을 죽이려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윤적이 잡히고 말았다. 다음 날, 오윤적을 참수하여 위엄을 보이려 했다. 그날 밤 유생 신세준이 무사들을 모아서 국경인의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놀라 밖으로 뛰쳐나온 국경인을 붙잡아 참살했다.
정문부는 구황과 강문우에게 명천을 탈환하게 했다. 순왜 정말수는 성을 빠져나와 산에 숨어 있다가 경성 토병 진덕인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순왜는 완전 토벌되었다. 이제 일분군을 몰아내야 한다.
1592년 12월 3일(음력 10월 30일), 일본군 1,000명은 명천 갯마을 가파리를 약탈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석성령에 왔을 때, 원충서의 병사 200명의 급습을 받았다. 일본군은 의병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라 후퇴하다가 숫자가 열세하다는 걸 깨닫고는 돌아서서 맞서려 했다. 그때 고참에 매복해 있던 방원 만호 한인제의 기병 300명과 다른 복병들이 합세했다. 일본군도 장수 5명이 4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돌격했으나, 조선군이 기병에 밀려 퇴각했다. 길주성 동쪽 장덕산(長德山)으로 퇴각했다. 이게 석성령 전투이다.
정문부는 장덕산 꼭대기를 선점했다. 일본군이 총포를 쏘며 대항했으나 유경천이 기병대를 이끌고 적병을 격퇴했다. 고경민은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포(砲)를 쏘며 차단하니 일본군이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이날 밤에 눈에 내리고 추위가 심하여 일본군은 얼어 싸우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의병대는 일본군 병사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했다. 이게 장덕산 전투이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일본군은 길주성으로 퇴각해 나오지 않았다. 정문부가 세 부대를 모두 모아서 성을 포위하자, 일본군은 성벽 위에 올라 조총을 쐈다. 이에 정문부는 무작정 공격했다가는 아군의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해 일단 물러난 뒤 성 주위를 완전히 포위해 적이 땔감을 얻을 수 없게 했다.
일본군 1개 부대가 마천령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면서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했다. 정문부는 쌍포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 수급 60개를 베었다. 일본군은 길주성과 영동관 책성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정문부는 군대를 둘로 나눠서 포위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땔감을 구하지 못해 병사들이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1593년 1월 초, 안변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자 ‘재차 관북을 평정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본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안변은 강원도와 함경도 경계에 위치한 지역이다.
단천 군수 강찬의 요청이 들어왔다. 정문부는 유경천 등 기병 수백 명을 단천으로 가게 했다. 1월 21일 2백 명의 일본군 선봉대가 단천에 이르렀을 때 강찬이 이끄는 단천의 조선군이 맞아 교전했다. 그러다가 패해 후퇴하자, 일본군은 이를 급히 추격했다. 그때 매복해 있던 유경천의 복병들이 쏟아져 나와 정면을 막고 후방을 차단했다. 일본군 100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병을 남기고 겨우 30명만 빠져나왔다. 이게 단천 전투이다.
가토는 열이 오를 대로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2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왔다. 유경천은 급히 퇴각했다. 가토의 본대가 마천령을 넘어오자 정문부는 3천 의병대를 이끌고 영동책 외곽에서 3번 교전했으나 패했다.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풀고 경성으로 후퇴했다.
이때 동장군이 눈(雪) 부대를 이끌고 왔다. 가토 기요마사가 진군할 북쪽 길을 모두 끊어버렸다. 가토의 호언장담은 동장군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길주성과 영동책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도둑처럼 밤에 빠져나갔다. 정문부는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함흥까지 추격했으나 가토는 이미 안변으로 돌아간 후였다.
이렇게 해서 함경도를 회복했다. 정의의 깃발을 든 함경도 의병의 승리다. 우리의 동장군이 적절한 시기에 개입한 북관 대첩이다. 의병장 정문부 화이팅이요, 함경도 의병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