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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Jul 02. 2022

[3-10] 정문부와 윤탁연

수필. 임진왜란

1593년 2월 29일,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이 한양에 도착했을 때 병사 2만 2천 명 중 전사자가 8,864명으로 집계되었다. 함경도의 의병은 해산되고 순찰사 윤탁연이 함경도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북관대첩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의병장 정문부이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높은 벼슬을 제수받지 못했다. 이는 순찰사 윤탁연과 빚은 갈등 때문이다. 제수(除授)란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는 것이다.     


윤탁연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592년(선조 25) 4월 파천하는 선조를 따라가던 중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했다. 1594년 4월 2일 사헌부로부터 뇌물 관련, 술과 고기, 기생을 많이 거느리는 점과 형문 중 매질이 심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선조실록 50권, 1594년(선조 27년, 명 만력(萬曆) 22년) 4월 2일 경술 1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헌부가 사욕만 채우는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의 체직을 청하다.”


이처럼 비리가 많은 자를 높은 자리에 앉히는 선조의 인사 정책을 알 수 없다.

윤탁연은 정문부를 꺼려했다.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신분인데 의병 대장이라 자칭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꾸짖었다. 


‘평사는 일개 막관(幕官)이니 마땅히 감사(監司)의 절제를 받아야 하고 서로 대등하게 대해서는 부당하다.’

정문부가 그 말에 따르지 않자, 그는 정문부의 전공(戰功)을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또 정문부의 부하가 수급을 가지고 관남으로 가면 그것을 빼앗아 자기 군사에게 줬다. 참 못된 상관이다. 


윤탁연은 ‘정문부의 행동이 불궤(不軌)스럽다.’고 아뢰었다. 그 말을 들은 정문부가 군사를 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군졸들이 흩어지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으며, 혹자는 사잇길로 달려가서 행재소(行在所)에 보고했다. 그러나 다루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둘을 무마시키려 했다.     


정문부가 적을 추격해 함흥에 이르렀을 때 윤탁연을 만나지 않고 돌아갔다. 윤탁연은 크게 노해 정문부를 뒤쫓게 하면서 ‘평사가 적을 놓아 내보낸 죄를 지금 당장 구문(究問)해야겠으니, 속히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참 이상하다. 전투 중인 정문부가 윤탁연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가? 또 길주에서 함흥까지 추격했으니, 놓아 보냈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가토 일본군이 북쪽으로 갈 때 함흥을 지나갔었고, 다시 남쪽 안변으로 갈 때도 함흥을 지나갔다. 함흥에 있었던 윤탁연은 무얼 했는가? 정문부는 구문할 대상이 아니다.


정문부는 그 점을 지적했다. ‘순찰사가 적을 놓아 보냈기 때문에 의병장도 적을 놓아 내보낸 것이니, 구문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다.      


윤탁연은 조정에 정문부를 발호(跋扈)한 자라고 보고했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하자, 윤탁연은 사신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사대부의 가속으로서 관남 지역에 있는 자들에게 곡식을 베풀어 구제하고 조정에서 북쪽으로 보낸 사람들에게 옷과 장비를 주니,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 모두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 남북의 백성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정현룡에게 함경도 병사를 제수하고, 정문부는 반란을 일으킨 백성을 주참한 공만 인정받아 당상관인 영흥 부사에 제수되었다. 그것도 윤탁연의 사후인 광해군 3년 10월이다. 정문부는 윤탁연의 마음만은 빼앗지 못했다.     


이후 정문부는 추부사와 장단 부사를 거쳐서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지만, 북인의 횡포에 관직을 고사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1623년 전주 부윤이 되었지만,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가 향년 60세로 죽었다. 


인간 정문부, 형장의 이슬로 스러질 때, 시종일관(始終一貫) ‘원통하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그의 인생이 원통하고 또 원통하다.     


우리 역사에는 정문부처럼 원통하게 죽은 사람이 많다.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어야 한다. 그것은 ‘명복을 빕니다.’ 혹은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미사여구가 아니다. 사소한 사안이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것이다.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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