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2부
“전라도를 점령하라.”
전라도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인지 일본의 도요도미가 이런 지시를 내렸다. 그에 따라 전라도를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그것을 지키려는 조선군 사이에 몇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것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첫 번째는 정암진 전투(鼎巖津戰鬪), 곽재우가 남강 북안의 정암진 부근 갈대밭에 50명의 의병을 매복시킨 1592년 7월 3일(음 5월 24일)에 시작되었다. 진주를 관통하는 남강은 호국의 강이다. 의기 논개가 왜장을 껴안은 채 투신한 강이요, 진주성 제2전투에서 패한 복수 의병장 고종후,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이 뛰어든 강이다.
7월 5일(음 5월 26일) 정암진 대안에 엔케이의 일본군 2,000명이 도착했다. 그들은 지역 주민을 동원해서 남강의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두고, 뗏목도 만들며 도하준비를 했었다. 그날 밤, 곽재우는 나무 푯말을 늪지대로 옮기고, 정암진 요소요소에 의병을 매복시켰다. 뛰는 일본군 위에 나는 곽재우가 있다.
날이 밝았다. 도하를 시작한 안코쿠지의 선봉대가 푯말을 따라 늪지대로 들어갔고, 매복해 있던 곽재우 의병에게 섬멸되었다. 안코쿠지의 주력군은 남강의 도하에 성공했으나, 그들 역시 의병의 기습 공격으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전투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그 진리를 50명의 의병으로 그 40배인 2,000명의 일본군을 물리친 의병장 곽재우가 증명했다. 이 전투 결과 곽재우 의병은 3,000명이 넘는 군세를 갖추게 되었으니, ‘네 처음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셈이다.
(음 6월 23일), 한성에 거주하던 일본의 고바야카와 군대가 영동과 무주를 거쳐 금산 성을 점령했다. 금산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요충지인데, 전투의 내용이 없다. 별다른 저항 없이 무혈입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군은 거기에 제6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주성 작전에 돌입했는데, 두 번째 웅치전투(熊峙戰鬪)와 세 번째 이치 전투(梨峙戰鬪) 등 양동 작전을 펼쳤다.
웅치전투(熊峙戰鬪)는 1592년 8월 13일(음 7월 7일), 승려 부장 안코쿠지 엔케이의 제1대가 금산-무주-진안-전주로 진격하던 중 웅치 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군 제1대가 웅치를 에워싸며 공격해 왔다. 이에 맞선 조선군은 3단계 전선을 구축하여 방어했다. 최외곽의 제1전선은 의병장 황박이 지키고, 산 중턱의 제2전선은 나주 판관 이복남이 지키고, 마지막 저지선인 고갯마루 제3전선은 정담이 지키고 있었다. 이복남 관군이 안덕원 계곡에 매복하고 있다가, 골짜기로 들어온 엔케이의 1개 진을 몰살시키며 잘 막았다.
8월 14일(음 7월 8일)에는 적의 파상공세에 밀려 제1전선이 무너지고, 제2전선도 무너졌다. 제3전선을 지키던 정담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이치 전투(梨峙戰鬪)는 고바야카와의 제2대가 금산-진산-전주로 진격하던 중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 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아치에서 전라도 절제사 권율(權慄)과 의병장 황박, 동복현감 황진(黃進) 등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제6군 2천여 명의 일본군과 맞섰다. 권율은 몸소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군의 목을 베는 한편 비겁한 병사가 눈에 띄면, 그 병사의 벙거지에 칼로 표시해 두었다가 즉결처분하며 군기를 바로 세웠다.
8월 14일 전주성이 함락되기 직전, 웅치의 일본군이 돌연 후퇴했다. 이치의 일본군도 거의 동시에 후퇴했다. 고경명 의병이 금산을 탈환하려고 쳐들어 것이다. 8월 15일 (음 7월 9일)에 벌어진 금산 제1전투와 9월 23일 (음 8월 18일)에 벌어진 금산 제2전투는 따로 정리한다.
네 번째는 우척현 전투(牛脊峴戰鬪), 이치 전투에서 패배한 고바야카와는 경상도 김천에 주둔한 1,500명의 별군을 이끌고 거창을 거쳐 장수군으로 진격한다.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일본군이 거창의 북쪽 우척현에 당도했을 때, 거기에는 정인홍 김면의 의병이 있었다. 김면은 (음 5월 10일)부터 곽준(郭遵),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조종도(趙宗道) 등 휘하 장수들, 거창에서 모집한 의병 등 2,000명이 있었고,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보내준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李亨)의 관군도 있었다.
일본군 선봉대가 우척현 고갯마루를 넘자 잠복 중이던 의병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3면에서 쏟아는 조선군의 화살 공격으로 일본군은 대열이 흩어지면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시체도 거두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명량 해전의 영웅 이순신도 전라도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이런 명언을 남겼다. 그 전라도를 의병장 곽재우, 정인홍과 김면, 절제사 권율 등이 목숨을 걸고 지켰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땅, 전라도를 지켜야 한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켜야 하고, 거짓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지켜야 하며, 일상의 거룩한 삶 통해 지켜야 한다. 전라도에 사는 우리가 그렇게 지켜야 한다.